창의지나 유사에서는 모두 김태환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고, 유사에서는 의병 활동 당시 윤진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공훈록에서는 김태환이 이명이라 적었다. 1970년에 유사가 발간되었으니 1946년 창의지 발간 이후 선생이 별세한 1965년까지는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산남의진유사는 산남창의지의 증보판이라 볼 수 있으며, 당시 생존한 선생의 증언이 유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니 아마도 유사의 기록이 맞으리라 볼 수 있겠다.김윤진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1882년 10월 18일 영일군(迎日郡) 기계면(杞溪面) 치동(致洞, 현재의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鳳溪里))에서 고려말 참판(參判) 김자수(金自粹)의 18세손 아버지 김규락(金奎洛)과 어머니 월성이씨(月城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문옥(文玉), 호는 운강(雲崗)이며, 이명은 김태환(金泰煥)이다. 1906년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때 고종의 측근 정환직(鄭煥直)의 명령으로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영천군(永川郡) 자양면(紫陽面) 검단리(檢丹里, 현재 자양면 충효동)에서 영천창의소(永川倡義所)를 차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창의소 본부에서는 소모요인(召募要人)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때 이종곤(李鍾崑)·김학이(金鶴伊)와 함께 영일군 기계(杞溪) 지방의 모집 책임자로 배정되었으나 신병(身病)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는 산남 의병부대(山南義陣)가 결성되었으나, 1907년 (음)9월 2일 영일군 죽장면(竹長面)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그러자 정환직이 다시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이때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07년 (음)9월 북동대산(北東大山)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부대를 찾아갔다. 대장의 환대 속에서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되어 기계·흥해(興海) 지방을 돌며 의병 100여 명을 모아 본진으로 보냈다. 이후 산남 의병부대는 청하(淸河)·흥해(興海)·신령(新寧)·의흥(義興)·의성(義城)·영덕(盈德) 등지에서 일제 침략기구인 분파소와 각 기관들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군 수비대와의 계속된 접전으로 군기와 화약이 바닥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의병부대가 일시 해산되었다. 이후 청하지방에서 정환직 대장이 일본군에게 잡혀 1907년 12월 영천에서 사망하자, 새로 대장에 추대된 최세윤(崔世允) 대장은 의병부대를 지대별로 분산시켜 경상 전역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하지만 각 지역 분대가 차례로 무너지고 우재룡(禹在龍)이 이끄는 팔공산 분대를 마지막으로 산남 의병부대 활동은 종결되었다. 이후 향리로 돌아와 은신하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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