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인연이 된 사람은 두 번째 만나면 눈에 잘 띈다.
낯이 익은 이유다.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잠깐잠깐 스쳐갔던가.
기억할 수도 없고 기억되지도 않는 인연의 골짜기를 타고 내려왔던가.
그러나 어떤 계기로 만난 인연은 또렷하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이 또한 지워지지만.
때로 어디서 만났다는 기억의 발원지를 찾아가기도 하지만.인연은 또 그렇다.
더 강렬한 액션으로 만나더라도 쉽게 잊게 되고, 아주 사소한 느낌에서도 문신처럼 새겨지는 인연도 있다.
남편은 우연찮게 카트기 하나의 배려로 굳게 심어진 케이스다.아니 잊었다고 믿었는데 집 앞 놀이터에서 남편을 봤다.
안면이 있는데 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카트기다>라는 외침이 내안에서 들렸다.
동전 백 원이 없어서 카트기 앞에서 망설일 때 자신의 카트기를 선뜻 내주며 돌아서던 뒷모습이 아름다운 남자를, 동네 놀이터에서 재회라니 이건 사건이다.
남편은 간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놀이터에 설치해 둔 의자가 치기어린 청소년들의 소행인 듯 깨어진 술병과 함께 파손되어 있었다.
며칠 후 임시로 간이의자가 놓여졌다.곧 튼튼한 의자가 설치된 다는 명목하에.
그러나 두달이 훌쩍 넘겨도 여전히 간이의자였다.
남편이 간이의자에 앉아 시선은 일정한 곳을 주시하지 않고 있지만, 느낌이 있었다.
내 눈에만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살아보니 단단한 콩깍지에 씌었던 것을 인정하고 말았지만. 이 동네 사세요?
그제야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눈꼬리가 처진 남편의 얼굴은 순둥이처럼 보였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자에 대한 경계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깨를 약간 치켜들었다 .여기 고모님이 살고 계세요 .그런데 절 아세요?
나만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 가까이 다가가 목례를 했다.
일전에 E마트에서 카트기를 제게 건네주셨죠?
남편은 길게 아, 하는 탄성을 뱉았다.
그 음절에서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상습범인가. 하는 의구심.
어쩌면 남편에게 있어선 함께 횡단보도를 건넌 많은 사람 중에 한사람일 뿐인 기억의 퍼즐이었을 것이다.
나는 유모차를 끄는 등굽은 할머니의 안전을 위해 속도도 맞춰주며, 또렷한 기억 속에 함께한 단발 머리 학생이었을 것이다.
장소와 시간과 만남은 일치하는데 기억의 선명성은 다를 수 있다.
결코 섭섭해 하지 않았다.
뭘 보고 있었죠?
남편은 옆자리 간이의자의 먼지를 손으로 문지르며 앉기를 권했다.
놀이터에 앉아 있으면 늘 저를 충전해주는 기분 좋은 놀이기구가 있죠.
혹시 맞혀보실래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던지는 그때부터 실례인줄 아시죠?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하는 질문은 약간의 스트레스를 동반하거든요.
남편은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으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신기하게도 남편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 위해 질문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남편의 옆모습을, 놀이기구를 둘러보는 척하며 힐끗 훔쳐봤다.
면도자국이 선명한 깨끗한 턱 선을 가지고 있었다.면도기 광고 속에 말끔한 남자의 턱 선처럼. 미끄럼틀, 시이소, 그네, 구름사다리, 철봉, 팔 굽히기 지지대. 수십 년 을 놀이터 근처에 살아도 죄다 그들을 호명해보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