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아주 기이한 하루가 찾아온다. 현실세계가 아닌 사차원 세계 속에 흡입된 어느 하루가 정면에서 맞닥 뜨리게 된다. 아니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걷는 것조차 바닥 위를 걷고 있는, 아주 생뚱맞은 하루가 시간의 톱니바퀴에 겉돌며 찾아온다. 그 느낌은 강렬하고 날카롭다. 두렵고 낯설다.남편과 약속한 주말은 찾아왔다. 아이보리색 K7을 몰고 왔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습이 색달랐다. 어쩌면 저 남자의 품속에서 오늘밤을 보낼지 모른다는 다가올 시간 속에 장면이 그려졌다.행선지가 정해진 것처럼 주저없이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익숙한 말투에 익숙한 행동으로 대하면 설사 오늘밤을 같이 보낸다 해도 조금은 보상받을 것 같았다. 남편의 농담에도 한옥타브 높은 웃음에 두 손을 가리며 어깨까지 들썩였다. 신이 났는지 유우머와 거리가 먼 사람처럼 비춰졌는데 남편은 은행창구에서 바라본 단면도를 펼치기까지 했다. 번호표를 빼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들렀어요. 초조하거나 느긋하거나. 창구안에서 창구 밖을 보다보면 t v를 켜둔 착각을 느낄 때가 있어요. 사람들의 움직임이 천천히 감지되면서 평온한 상태로 돌입하게 되죠. 움직임이 빠른 사람은 은행 강도외엔 없죠. 제 말 맞죠? 나는 여기에서 웃었다. 그래야만 안전운전에 이상이 없을 것 같았다.은행 안은 작은 열대어의 어항처럼 알맞은 온도에 알맞은 산소와 알맞은 먹이로 천천히 이쪽에서 저쪽으로 헤엄치고 있죠. 그 풍경을 매일 보는 저는, 역시 미세한 움직임과 완만한 경사를 선호하게 되었답니다. 혹시......그 말은 제게 천천히 다가온다고 선언하시는 건가요? 내가 채워진 안전띠 끈을 흝으며 물었다. 그럴지도. 남편은 선명한 콧날을 앞세워 대답했다. 혹시 오늘밤 같이 있더라도 아무 일이 생기지않는다는? 빙고. 남편이 귀엽게 대답했다.장애물도 없는데 차가 한번 비틀거다. 오늘밤 반드시 함께 있을 겁니다. 같은 방에서 같은 시간을 보낼 겁니다. 허지만 제가 똑똑 노크는 먼저 하지 않을 겁니다. 남편이 반짝 웃었다. 만약 제가 노크를 하면은요. 어떻게 되죠?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한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그러면 못이기는 척 문을 열어야죠.가을로 가는 마차를 닮은 구름이 산언저리에 걸쳐져 있었다. 요란한 단풍이 산의 초입부터 물들기 시작하는 구월 하순이었다.차도와 철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차는 멈췄다. 일단정지라는 푯말을 남편이 소리 내어 읽었다. 나도 따라 읽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농사철이라서 그런지 국도는 한산했다. 다만 길가에 세워둔 차와 들녘에서 일하는 농사꾼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일단정지를 하는 게 아니라 오단정지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쯤 남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곳에 건널목이 있었어요. 차단기는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반으로 갈라놓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심판 같은 존재였어요. 심판의 호루라기에 맞춰 차단기 앞에 선 사람과 서지 않은 사람으로 편을 갈라놓죠. 차단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자유롭게 제 갈 길을 가며 눈앞에서 멀어지죠. 차단기 앞에선 사람들은 기차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죠. 얼마나 환타스틱한 풍경입니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