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성적으로 판단이 분명한 나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내 결정은 분명했다.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었다. 은행잎은 얕고 구석진 곳을 찾아 몰려다니고 있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장소가 정해지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남편의 머뭇거림도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런 이유를 나이 차이에서 접근해갔다. 남편이 쉽게 선두에 서서 지휘하기엔 약간은 망설여지는 여섯 살 차이였다. 그렇다면 내가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 할 것 같다. 첫 단추가 잘 끼여지면 그다음 단추는 끼우기 쉽지 않는가. 저……지금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네요. 그렇죠?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든 남편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부터 저도 솔직해질게요. 남편은 길가에 정차해둔 차로 나를 데려갔다. 차문을 열고 조금 서두르는 동작으로 나를 앉혔다. 그런 남편이 싫지 않았다.운전석에 앉은 남편은 주위를 둘러 본다 싶더니 차를 몰아 모텔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모텔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등대와 갈매기와 바위와 수평선의 통통배, 바람까지 그려 넣기 위해 모래사장에 선 여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푸른 색채를 강조하여 건강함을 얻어 내려는 화가의 단호함이 엿보였다.그래야만 이런 곳에도 수시로 드나들 수 있다는 계산일까.모텔 벽에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번쯤의 피난처가 모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추천한 것일까. 일상의 탈출을, 모텔과 바다를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저울질한 것일까. 아니면모텔안의 자극을 더 큰 부피로 느껴주기 위한 배려일까. 왠지 프론트 데스크까지 따라가기엔 멋쩍어 벽화를 보며 이생각 저 생각에 잠긴 나에게 남편은 키를 받아 나타났다. 6층이네요. 6층이네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남편의 말을 굴러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아주 앳된 선남선녀가 내렸다. 약간의 경계와 호기심 어린 눈을 쳐다보면서 모텔 밖으로 나갔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정상을 맛보고 내려오는 사람과 이제 정상을 향하는 사람의 교차점은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서로의 눈은 마주치지 않지만이미 가고자 하는 정상은 같기에 느끼는 동류의식. 그리고 같은 곳을 드나드는 은밀한 친밀감. 왠지 빨리 잊어버리는 인연의 실선.남편은 605호실 앞에서 키를 돌렸다. 딸깍 잠금장치가 열리고 남편은 문을 열었다. 중세 기사처럼 정중하게 레이디 퍼스트 동작으로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하기 애매하여 리모컨으로 티비를 켰다. 티비에는 연일 최순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동네 아줌마의 농간에 놀아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버젓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지 않는가. 우리는 그런 대한민국 국민이다. 참담하고 비통하다. 하나같이 패널들은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욕실로 들어간 남편의 물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벗고 타월로 몸을 둘렀다. 남편을 위해 믹스커피를 태웠고 머리끈으로 머리채를 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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