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유리를 통하여 남편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남편의 실루엣을 더 자 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종이컵에 담겨진 녹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온수의 온도가 천천히 내 몸에 전달되고 있었다. 마치 캠퍼스 잔디밭에 봄 햇살을 누리기 위해, 누워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늘은 멀지 않는 곳에 청명하였고 구름은 온순하게 떠다녔다. 간간히 새가 날아 갔고 나는 에드벌룬처럼 부풀어 올랐다. 시작을 알리는 봄 햇살이 톡톡 터졌다. 콧노래며 잔디의 촉감이 나를 아가씨에서 여자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무언가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 무언가 채워 넣고 싶은 마음, 홑씨로 날아든 민들레 씨앗이 콧잔등에 앉았다.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작고 부드럽고 은밀한 속삭임 같은 저 몸으로 세상 속에서 진정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훅하고 바람을 입으로 불었다. 민들레 씨앗은 또 다른여정을 찾아 나풀나풀 날아갔다.녹차를 마신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종이컵이 정확하게 통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주변에 떨어졌다.약간은 멋쩍은 표정으로 다가가 종이컵을 쥐어 들었다. 몸을 감싼 타월을 한손으로 쥐고, 한 손으로 정확도를 맞추기 위해 시물레이션으로 몇번 시도를 하는 동작을 해보다가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다.도전! 속으로 외치고 싶었던 말이 너무 크게 밖으로 튀어져 나왔다. 놀란 내가 욕실로 눈이 갔을 때, 언제부터인지 남편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샤워를 끝낸 알몸으로. 3점슛 기대하겠습니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몇 번의 시물 레이션으 로 맞춰놓 은 자세에서 삐걱했지만 약간의 앙탈이 섞인 몸짓으 로 던져버렸다. 다행히 종이컵은 안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알몸으로 박수를 쳤다.
나이스 샷.욕실로 들어왔을 때 혼자 웃음이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샤워기를 틀자 남편이 다녀간 적당한 물의 온도가 나를 촉촉이 적셔주고 있었다. 비누를 문지르고 조심스럽게 거품을 내었다. 거품은 동화속 요정 같았다. 끝없이 재잘 되고 끝없이 속삭였다. 기분 좋은 재잘거림이고 속삭임이었다. 내 몸 구석구석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지치지도 않고 부드럽게 감싸주기까지 했다.지금은 왠지 모를 청결함이 필요할 때다. 재단에 바쳐질 처녀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쁜 생각, 나쁜음식을 금기하여 가장 정성을 쏟은 몸으로 피라미드 재단을 향했던 처녀처럼 나는 불순물을 걸러내었다.짝사랑 했던 누군가를, 몸을 섞었던 누군가를 이제는 여과기에서 걸러 내었다. 그만큼 정성들여 몸을 씻었다.그 의미가 주는 느낌은 강렬했고 욕실 문을 열고 나가면 기다리고 있을 남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몸에 묻은 비누거품을 씻어 내었다. 욕실 바닥의 하수구 구멍으로 거품들이 빨려 들어갔다. 마치 행렬처럼 꼬리를 물고 따라 들어갔다. 찌꺼기를 차단하는 철망에 머리카락과 음모가 듬성듬성 붙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을까. 그러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흘려 놓으며. 자신의 유전자가 어느 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할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