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조용히 창문을 내렸다. 찬 밤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 결정을, 최소한 결정이 아니라도 긍정에 가까운 해답을 줘야할 것 같은 모습으로 열린 차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밖의 풍경은 멀리 마을로부터 도망 나온 엷은 불빛이 툭툭 던져졌다. 겨울 초입은 성장을 멈추게 하였다. 풀도 나무도 언 땅속의 온기를 찾아 맹렬하게 뿌리로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지상의 연결된 자신의 생명은 움츠려들거나 소멸되거나 쉬어가고 있었다. 남편이 나를 쳐다봤다. 제게 사실 여자가 있어요. 남편의 말에 반대쪽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도로 위는 밤이슬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쩌면 별빛 일수도 달빛일수도 있는 부드러운 빛이었다.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게 느껴지는 빛이 한 겹 두 겹 껍질을 감싸고 있었다. 밤을 향한 열망으로 도로는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여자가 있어요. 여자가 있었어요도 아닌 있어요는 지금 진행 중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내가 혼자이기에 당연히 혼자일 줄 알았는데 누군가 남편 주위를 지키고 있었구나. 문득 이 남자를 뺏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 페파민트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던 남자를 사귄 적이 있다. 늘 그 남자의 입속이 궁금했다. 입을 벌려 박하향 가득한 남자의 입속으로 내 혀를 집어넣고 싶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입안을 가지고 있을까.남자의 작은 눈과는 동떨어지지만 입안에는 페파민트 요정들로 가득하겠지. 이빨과 혀와 목젖과 잇몸을 놀이터로 하루 종일 통통 튀는 향기의 남자를 확인하기 위해 오 일째 되는 날, 영화관에서 남자의 입술을 받았다. 관객들이 듬성듬성한 개봉관에서 남자는 팝콘속의 내손을 잡았고 눈이 마주쳤다. 팝콘은 가운데에서 샌드위치가 되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했다. 박하향이 얼마나 공략하며 달려들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입안에 남아있는 팝콘 찌꺼기를 최대한 모아서 한꺼번에 침과 삼키고 남자의 공격을 입으로 막았다.남자는 만날 때마다 먹던 페파민트 향은 내 기대치도 훨씬 못 미치게 엷었다. 팝콘 때문일까, 하는 희망 섞인 배려도 뭉갤 남자의 입안은 구렸다. 술먹은 다음 날 역한 냄새가 내게 전달 되었다. 남자도 팝콘도 영화도 버려두고 뛰듯이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남자에게서 박하 향을 기대한 내 잘못도 인정했다.남편에게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냥 남자이기를 원했으며, 내 남자이기를 원했다. 그냥 남자는 맞았는데 내남자는 비켜갔다. 모텔로 가기까지 절차 속에, 번거로운 확인이 필요했다면 그렇게 빨리 몸을 섞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만나고 계시는 분이 더 많은 추억과 정이 쌓였겠지만 저도 구체적으로 접근해주세요. 그리고 고마운 점은 제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고백해 준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자리 잡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저는 결혼을 전제로 처음부터 만났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주춤거리는 면이 없지 않겠지만 굳이 제 마음을 털어놓아야만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이해해주시겠죠. 서로 마음이 통했다면 단번에 여자 분을 정리하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서로 상처를 받지 않게 천천히 여자 분을 정리하셔도 괜찮아요. 어쩌면 저를 정리할지도 모르는 알 수 없는 일이네요. 본인 마음이 중요하니까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