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병구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풍향계처럼 바람에 움직이는 바늘 방향은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속에 싹트는 연정의 불씨는 동성에 더 기울어져있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몇몇의 여자들도 있었다. 그런 사실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순리에 역행하는 한 남자를 바꿔보려고 매력을 발산하며, 꾸준히 섹스에 전심전력하던 여자들은 한계를 절감하고 멀어져 갔다고 했다.가능성을 닫아버린 병구의 심중은 얼마나 낙관적이고 참담할까. 아무 곳에나 머리를 부딪치고 싶은 마음을 가늠하진 못하지만 성소수자로 살아가야하는 병구의 현실을 미루어 짐작은 되었다. 그러나 쉽게 적당한 위로로 병구에게 말을 걸기도 싫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입 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가만히 있었다. 병구의 움직임이 잔잔해 질 때까지. 어차피 자신이 짊어지고 갈 몫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기다려주었다.격렬한 진동도 잦아들어가고 미세하게 손끝이 까닥까닥 움직이고 있었다.침대의 모서리를 툭툭치던 병구가 반짝 눈을떴다. 가만히 그의 등에 가슴을 밀착시켜 심장의 박동으로 평온을 찾아줄 생각은 있었다. 내 가슴은 단지 그에게는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크로즈의 팻말을 내다걸은 상점일지라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두드리다 보면 숙식하는 점원이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아니면 미처 잠그지 못한 문이 열리기도 한다. 모든 가능성은 곳곳에 매복되어 있다. 내 가슴은 스무 살의 탄력과 스윗함을 겸비했으니까. 그렇지만 병구는 묵묵히 등을 맞대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의 역할은 거기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첫 남자가 게이라는 사실을 이번에는 내가 받아들이며 안정을 찾아야 될 것 같았다.병구가 샤워실로 들어갔다. 나는 남겨졌다. 한 남자를 내안으로 끌어 들이기위해 용기도 필요했고 수긍도 필요했다. 병구와 보낸 밤은 짧았지만 한층 정신적인 성숙을 예견하기도 했다. 병구는 지금 샤워중이다. 아무 말 없이 샤워실로 향한 뒷모습은 엄숙했다. 자신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어정쩡한 관계의 지속은 서로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뒷모습이 얘기해 주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받아들여야 했다. 강의실 창가에 앉아 졸린 눈을 하고 조각햇살을 담아내던 병구라는 남자가 있었다. 간혹 나를 설레게 하면서 내 일상을 꽉 채워주던 남자는 이성을 사랑할 수 없는 마술에 걸린 동성애자였다. 두부 자르듯 병구를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지만 상처의 딱지가 아물면 흔적으로 내 몸 어딘가에 머물 것이다. 혼자서 휘청휘청하며 살고 있는 무게를 서로 나누어가질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아무 말 없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옷을 찾아 하나씩 입기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병구와 마주치는 것이 개운하지 않았다. 어제의 시간까지 챙겨오고 싶었다. 한 때 짝사랑한 병구라는 남자를 온전히 밀봉해두고 싶었다. 빗살무늬 유리를 통해 비춰지고 있는 샤워실안의 병구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아주 잠깐 눈물이 고여 먹먹했지만 이내 옷매무새를 거울 앞에서 확인하고 모텔 밖으로 나왔다. 여름으로가는 햇살이 눈부셨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