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행로에 궤적을 채우며 아직도 터널을 벗어나지 못한 꼴로 앉아 있는 것이 나라면,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거칠 것 없이 소망의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면서 세상을 일구어 온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것도 오년 전에 여드름이 나면 자살하겠다던 은영이가. 그 겨울 나는 소위 말하는 연애편지 한 통을 공책에 찔러 넣고 지하철을 탔다. 대학 4학년인 내가 취직이다 뭐다하는 잡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생활을 무시한 채 걷잡을 수 없이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다니는 학교에 재직하는 교수였는데 나는 그녀의부와 명성만 송두리째 사랑하고 있었다. 졸업을 하여도 취직이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알토란같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직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집을 알아냈고 마침내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그녀는 이 편지를 받아 쥐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장난기에서 출발했지만 그 생각이 집요하게 가슴을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 차고, 나는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결론을 지었다. 그렇게 복잡하던 지하철이 신도림역에서 많은 공간이 생겼다. 출입구에 기대어 한심한 나를 탓하면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로 자위하며, 교수의 집을 향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굳이 운명이라고 내 어깨까지 툭툭 쳐주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고생들이 나를 보며 킥킥 거렸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을 수 있는 나이다 생각하고 개의치 않았다. 부평역에 내려서 챙겨온 약도를 보며 이 골목 저 골목 뒤져서 겨우 그녀의 집 앞까지 당도했다.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다행히 그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역력한 채 나를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책갈피 속에 끼워 둔 편지를 찾았다. 여차하면 악 소리를 지를 것 같은그녀를 남겨둔 채. 없었다. 편지는 커녕 개나발도 없었다. 나는 침착하게 다시 한번 꾸벅 절을 하고 돌아섰다.
기회는 또 있으니까. 이번에는 길거리에서 내가 악악 소리를 질렀다. 고쳐 쓰고 고쳐쓴, 백 번도 더 읽어 보았을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내 몫의 시간이여. 따뜻한 둥지여. 지나쳐 왔던 내 울타리속의 모든 추억을 그리워하며 함께 할수 있는 당신을 기다리나니, 내 의미의 시작이자 끝인 당신의 가슴에 지금 분주히 다가가고픈 고적한 외로움으로.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면서 전철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다소곳한 여고생이 흰 칼라의 교복을 입고서 있었다. 혹시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용무가 있지 않나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여고생은 정확히 내게로 걸어왔다.“이 편지를 찾으셨죠?”은영이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편지의 뒷부분은, 백화점이 휴식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의자에서 은영이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언젠가는 당신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이어질 흐름을 기다리고 있는 에드발룬 같은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자, 그러면 안녕. 마지막 부분까지 다 읽고 난 우리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웃음이라선지 쉽게 멈추지 않았다.“은영인 무슨 생각으로 내 뒤를 밟았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