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그렇구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서로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의 어디쯤에는 용기도 필요하리라. 머뭇거리다가 놓쳐 버리는 사랑도 이 땅에는 부지기수이리라.“좋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가족들은 아직 독일에 있어?”은영이는 독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눈치였다.“그래, 독일은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으니까. 가자.”계산을 하는 동안 은영이는 밖으로 나가서 첫째 계단에 머무르고 있었다.“운치가 있어요.”“내 문학의 실체를 껴안게 해준 소중한 계단이지.”그녀가 한 계단 먼저 앞서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봤다. “결코 천박하다고 생각하진 않죠?” “무슨 그런 말을?”
“나는 형의 구속이 아니에요.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면 스스로 떠날 거예요. 가급적이면 형의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할게요. 내게…… 어떤 기대도 하지 마세요. 분명한 것은 형의 잃어버린 한 개의 갈비뼈가 아니에요. 그럴자격도 없구, 자신도 없구. 올 때도 그랬던 것처럼 갈 때도 그렇게 작은 미소로 돌아설 수 있도록 서로를 묶어 두기로 해요. 그럴 수 있겠죠?”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물론 은영이도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소위 말하는 동거가 시작되었다.나는 그즈음 방송 드라마 한 편을 집필하고 있었다.부와 명성을 함께 얻었으나 무언가 미진하게 남아 주인공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시사드라마였다.마감날짜를 넘기지 않으려고 나는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그녀는 곁에서 내가 불편하지 않게, 자신의 존재를 잊은 채 마치 컴퍼스로 그려진 원의 중심이 내게서비롯되는 양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를 소중하게 받아 들였다.방에 진열된 몇 점의 수석이 깨끗하게 닦여졌고 어항의 이끼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묵혀둔 빨래가 빨랫줄에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있었다.비로소 내 영토가 푸르게 되어갔다.나는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김치찌개 냄새까지 놓치지 않았다.왜 일찍 결혼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은영이의 등장은 내게 던지는 메시지가 컸다.진정한 자유는 혼자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톱니바퀴가 어긋나지 않게 도와주는공범자가 필요한 것이리라.용기가 수반된.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술술 글이 써졌다.마감 날짜를 어기지 않고 탈고된 원고를 방송국에 가져다주기 위하여 나설 때였다.“형, 나 내일 짐 좀 가져올게.”“짐? 그래.” 그러고 보니 은영이는 정말 달랑 몸만 가지고 내 영토에 입적한 셈이다. 내 청바지를 둥둥걷어 입거나 와이셔츠 앞을 질끈 동여 메고 편안한 대로 생활하고 있었다.“내가 너 무 무 관심했군.” “
그래.다녀와. 어딘데? 독일? ” “가까운 곳이야. 아무튼 갔다 온다.” “그렇게 하십시오.” 밖으로 나오니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은영이에게 두 팔을 크게 흔들어주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