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도 은영이를 한번 데려가야 하고 병구에게도 인사시켜야 하는데, 원고 청탁받았을 때보다 마음이 더 급해져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마술사 은영이. 그녀가 다음날 정말 짐을 가져왔다. 저녁 여섯시쯤 되었을까. 분홍색 물감을 엷게 타서 붓으로 휙휙 뿌려놓은, 그네의 머리위로 반짝 빛나는 서산하늘이 좋았다. 아이들이 매달려 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그네는 두 팔로 분명하게 지탱하고 있는 골리앗처럼 당당하게 보였다. 노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나간 은영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떠난 것일까. 이제는 큰 부피로 다가와 버린 은영이의 존재가 너무나 절실했다. 그녀의 부재중은 묵과할 수 없는 필요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결혼이 그녀에게 족쇄라면 나는 서둘러 식을 올리리라. 그만큼 아련하게 내 숨통을 죄고, 내 가슴에 둥지를 튼 채 깊은 체온을 나누고 있음이라. 같이 동행하려는 나를 굳이 만류한 까닭은 무엇일까.아무려면 어떤가. 지금이라도 형 하면서 달려와 내 가슴을 두드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몇 시일까. 빨간 능금 반쪽이 서산에 걸려 있었다. 그 때였다. 능금 반쪽을 베어 먹은 범인처럼 은영이는 그네의 가랑이 사이 저쪽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무언가에 실려 있었다. 자전거였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생소하여 짐짓 환시를 느끼고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 환시를 더욱 부채질해주는 것은 놀이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모래 장난하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네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한 은영이는 시소에 걸터 앉아있는 내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온 탕아 같지 않아요?”놀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조금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은영이가 타고 온 자전거는 장바구니가 앞에 달린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바구니 안에는 몇 점의 옷이 잘 개켜져 있었고 짐받이에는 모서리가 낡은 가방 하나가 실려 있었다.분명한 것은 은영이가 한 발을 바닥에 짚고, 한 발은 페달을 밟은 채 타고 있는 자전거는 이미 자전거가 아니었다. 아니 기사의 말처럼 믿음직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웬 자전거야?”아까의 조바심을 감추기 위하여 볼멘소리로 물었다 “자전거가 아니고 은미예요” “은미?” “은영이 미래란 말이에요. 자신의 이름을 모르면 은미는 절대 고분고분 하지 않아요. 형도 은미의 등을 빌리려면 이 점 명심해야 돼요.”노을빛을 받아 불콰해진 얼굴로 정색을 하고 있는 은영이가 귀여웠다. 어쩌면 은영이가 꿈꾸고 있는 것은 정착이리라. 지렁이를 잡아서라도 살붙이 하나 없는 독일에서 정착하고 싶었던 아버지처럼 그녀도 자신의 영토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어떻게 하여 다시 이곳으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지난 몇 해 동안 부평초처럼 살아왔다. 늘 저 미래와 함께 은영이가 소망하여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미래는 다만 그 둘레에서 낮은 둔덕을 만들어 놓고 장애물이 아닌 장애물로 남아 끊임없이 그녀를 채근하여 왔을 게다. 나는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어느 때는 먼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은영이의 앙금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내 이전에 거쳐 간 남자들. 내 이전에 지워지지 않을 문신처럼 새겨버린 아픔의 덩어리.-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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