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창문 앞에 서있었다. 한 번도 자신은 세상을 등지지 않았는데,왠지 세상은 항상 등만 보여 주었다.다가가면 멀어지고 다가가면 낭떠러지 같은 등만, 남자를 가로 막았다.그 암담함에 길들여지진 않았다. 늘좌절하고 상처를 입어 비틀거렸다.적응되고 진화되는 것이 세상사의원칙으로 알았는데 남자가 품고 있는 ‘세상에 다가가기’는 엄청난 간격이 있었다. 마치 거친 바다에서 둥그러니 뗏목에 몸을 싣고 의지할 곳을 찾아가는 죽음을 동반한 행로였다.
산다는 보장은 처음부터 없었다. 작은 무인도라도 만난다는 기대도 없었다. 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시험대에 올려 진 자신을 확인하고싶었다. 물결선을 따라가는 뗏목은등대의 불빛과는 무관했다. 이미 바람에게 방향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방이 고요해도, 암고양이의 발톱처럼 할퀴듯 달려드는 파도 앞에서도뗏목은 앞으로 나가야한다. 아니 앞과 뒤는 구별이 없다는 것이 뗏목이다. 전진인지 후진인지 모를 막막한 바다에 떠다닐 뿐이다. 차라리 강한 무언가에 뗏목이 뒤집어지고 멈춰버렸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곧 헛수고라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균형을잃고 비틀거려도 의지가 남아있다면 중심은 다시 뗏목으로 옮겨와 자신은 또 다른 아침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삶이 궁금해졌다. 작은 반전이라도 주어진다면 붙들고 싶은 본능에 가까운 몸짓으로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 자신 이외의 삶을 신경쓸 기력조차 없게 무지막지하게 누르는 저 거대한 무게를 어찌 감당해야하는 데만 온힘을 다해도, 벅찬 인생이었는데 말이다. 성 정체성의 불확실성, 남자인지 여자인지 머릿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모호한 정체를 찾아 살아온 수십 년은 온통 두려움과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우유부단함에,허기에, 모호함에 시달렸던 자신을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남들에겐 하루일지 몰라도 남자는, 하루가 아닌 반나절만 시간이 주어진 것같았다. 일상 속에서 이명으로 들려오는 소프라노의 음성은 남자를 흔들어 놓았다. 남자의 알맹이는 여자로 한발씩 접근하는 가속이 붙고 있었다. 2017년, 12월 31일.
남자도 하루치를 남긴 시간 앞에서서 창문 틈사이로 찬바람이 곰실곰실 새어나오고 있다고 느꼈다. 하루가 가는 시간과 일 년이 가는 시간을 저울에 올리면 무게는 같을 것이다. 같은 무게이지만 스스로 만든 무게에 후회와 각오로 더한층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경계선으로 하여금 새롭게 재정비하는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선물할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 밝아오는 2018년에는......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계획도 없이 방치한 채로 살아온 자신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도 이룬 게 있다면 혼자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독립한 성과도 있었다. 창문 밖은 겨울이 몰려다녔다. 잔 나뭇가지로 타고 넘는 바람과죽은 갈대들이 엉킨 강가의 햇살과패딩잠바 속을 파고드는 움츠린 행인들의 가슴이, 줌 카메라처럼 당겨져 크게 쿵쿵 다가왔다. 모두가 몸을사리지 않고 명확하게 보였다. 남자는 포옥 한 숨을 쉬었다. 때 맞춰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었다. 믹스커피를 이빨로 뜯어내어 종이컵에 쏟았다. 프리마가 늦게 쏟아져 믹스커피를 하얗게 덮었다. 왠지 안심이다. 블랙커피가 주는 우중충함을 상쇄시켜주는 프리마에 대한 믿음이 앞섰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