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에서 받은 트렌스 젠더의 번호를 눌렀다. 성전환 수술에 앞서 조금 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남자가 마음을 다독였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가 제일 크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그 아픔의 덩어리에, 자신이 모르는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얼마만큼의 갈등과 얼마만큼의 결심을 섰을 때 실행에 옮겼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모난 인생이 조금 부드러워질 것도 같았다. 신호는 가고 있었지만 좀체 받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지고 있을 때 갑자기 신호음이 뚝 끊겼다. 남자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것 같은데 저쪽에선 아무 말이 없었다. 일이초의 침묵이 남자를 불안하게 했다. 다시 일이초가 흘렀다. -전, 양귀비에 술을 마시러 갔다가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이 번호를 건네 받았습니다. 너무 힘은 드는데 누구에게 얘기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용기를 내어 전화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목소리라도 들려주셔서 제게 탈출구를 혹시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없겠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하는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빈전화기를 들고 혼자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 때 즈음, 숨소리가 들렸다. 호흡을 참다가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묵직한 숨소리였다. 남자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매달리다시피 빠르게 통화를 이어갔다. -저는 어떠한 부담감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제 안에 소용돌이 치는 이 정체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제 보다 먼저 그 길에서 아파했고 힘들어 했을 그쪽 분의 경험담이라 해도 좋고, 조언이라고 해도 좋을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처한 상황에서 그 어떤 말씀도 힘이 되고 용기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숨소리마저 뚝 끊긴 핸드폰의 저쪽에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았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전화를 해서 살아온 아픔과 갈등을, 그리고 선택을 얘기해 달라고 한다면 순순히 얘기해 줄 수 있을까. 반반이었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향방이 갈라질 것도 같았다. -혹시 마음이 바뀐다면 이 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이렇게 전화 드린 것도 역시 제 마음이 편하자고 드린 이기심이지만, 그렇지만 얘기를 하다보면 서로의 마음이 편해질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자는 핸드폰을 탁자 팔걸이에 올려두며 다시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2018년 1월이 스물다섯 남자의 청춘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작년 포항 지진으로 원룸이 흔들거렸다. 남자는 꼿꼿하게 서서 흔들거림을 몸으로 이겨내었다. 혹시 무너지거나 건물더미에 파묻히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공포와 위험에도 이겨내야만, 내성이 남자의 몸 깊숙이 자리 잡아 세상 안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살아볼 건더기가 생길 것도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