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의 상상 속에 법진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혼자 얼굴을 붉히며 법진이 사라진 법당에 눈길이 멎었다. 유월 햇살이 한 움큼씩 법당 기둥에 달라붙어있었다. 꽃 살 무늬 여닫이문이 반쯤 걸린 고리의 틈새만큼 삐꺽거렸다. 선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명적암을 타고 넘는 바람소리가 선영의 귓가에 맴돌았다. 서로 맞물려 있던 세상 속에서 떨어져 나온 느낌을 강렬하게 느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누르는 무게에 압사할 것 같은 절박감에선 벗어나고 싶었다. 이전의 누군가도 힘들어 했으리라. 일찍 일어나 출근 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러 집을 나섰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약속도 배회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지금 이 삶이 정답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어딘가에 정답은 존재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간절함으로 사표를 던졌다. 어느 친구는 복에 겨워 발광을 한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무엇이 무료한지 무엇에 힘들어하는지 어떤 연유로 멈춰있다고 생각하는지 그 해답은 친구도 선영도 몰랐다. 다만 서로의 기준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답으로 만들어 갈뿐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면 오답으로 간주될 것이고. 실상 정답과 오답은 자신만이 채점을 매길 수 있다. 남들이 오답이라고 선을 북 그어놓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 선을 구부려 동그라미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고 세상사이고 온전한 자기중심적 가치 기준일 수 있다. 선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자 피식 웃었다. 이번엔 가까이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아닌 모양으로 날개짓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짝과 사랑놀이를 하는지 가파른 울음과 여운이 이어지는 울음이 섞여 선영에게 들려오고 있었다. 선영은 누워서 어깨장단을 거들어 주었다. 새가 날아가자 잔 나뭇가지의 여린 울음이 공명되어 들려왔다. 그러다가 처마 끝 풍경소리는 여울지면서 선영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이 들었다. 얕은 잠 안에 바람소리가 여전했다. 풀 먹인 빳빳한 바람도 한번은 문고리를 흔들고 한번은 앞산을 흔들고. 선영의 자유는 칠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산은 푸름의 절정을 내달리고 있지만 가을의 빈자리도 고민하고 있었다. 얕은 잠속에 꾸는 꿈은 더 선명했다. 맨발로 빗물고인 법당을 첨벙첨벙 뛰어다니던 선영은 곧 방문 밖의 새처럼 날았다. 겨드랑이를 간지럼 먹히던 날개는 선영의 비상을 도왔다. 눈을 떴다고 생각했을까. 이내 잠이 들었다. 잠과 현실을 넘나들며 알쏭달쏭한 상황 속에 놓여졌던 선영은 눈을 떴다. 문밖에서 두런두런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뒤꿈치를 들고 아기 창으로 밖의 풍경에 관심을 보였다. 할머니가 젊은 남자를 옆방에 안내하는 모양이었다. 선영처럼 몇 달 묵을 갈 셈으로 방은 구한 듯했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선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을 피해 명적암을 택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색깔과 맞는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한 번도 이런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근거리다니, 여전히 세상 안에 머물러 있을 에너지가 곳곳에 매복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