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에서 남자의 잔기침 소리가 들렸다. 기침소리는 콕콕 부리로 쪼는 듯했다. 뾰족하고 단단하여 마치 나무줄기에 수직으로 붙은 딱따구리처럼 전달되어왔다. 아까 골짜기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남자의 실루엣과 잔기침 소리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사물과 소리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쉽게 그런 마음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아픈 몸에 적당한 휴양지로 선택한 명적암의 하루는 어쩌면 길게 느껴졌을 게다. 자신처럼 뒹굴 거리다가 주위풍경도 익힐 겸 밖으로 나왔을 때, 골짜기 저편에 발가벗은 한 여자에게 시선이 멈췄다. 먼 거리에서 한 사람의 자유를, 한 사람의 해방을 지켜본다는 것은 자신의 녹슨 부품에 희망을 주는 산뜻함이 아닐까. 선영은 옆방에 남자가 궁금해졌다. 기침은 멎어있었다. 벽과 벽 사이에서 서로를 의식하는 인기척이 조곤조곤 들렸다. 남자도 어쩌면 선영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 벽에 귀를 대고 있을 것 같았다. 서로의 달팽이관으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울림에 촉을 다하고 있었다. 숨소리 심장박동 소리까지 얹어. 후두두둑. 빗줄기였다. 아기 창으로 얼굴만 내밀었다. 솔릭을 예고한 긴급재난 문자대로 한바탕 빗줄기가 거세게 산사를 덮을 모양이었다. 가는 빗줄기의 신호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표창처럼 꽂히고 있었다. 선영은 또 다른 세상에 버려진 자신을 실감하였다. 군중속의 고독을 도시가 주었다면 산사는 개인 속에 고독을 선물 꾸러미처럼 안겨주었다. 틀림없이 유토피아를 찾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손에 잡히거나, 닿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가질 수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것과, 가질 수 있지만 가질 밖에 없는 차이에 눈을 뜬것일까. 철학과 논리도 이 거대한 자연의 꿈틀거림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의 주장밖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골짜기는 파스텔 톤으로 깊고 묵직하게 칠을 더해가고 있었다. 숲은 숲대로 낮게 엎드려 울고 키 큰 풀들은 고개를 꺾거나 허리를 구부려 빗방울의 무게를 안간힘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저 둔탁한 빗줄기 너머로 오소소 떨고 있을 어미 새가 생각났다. 알을 품은 둥지는 물이 차올라 체온의 전달을 가로막고 본능적인 모성애는 떠나지 못할 족쇄로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어미 새가 있을 둥지를 가늠하면서 골짜기에 무심히 시선을 던져둔 선영에게, 고라니 두 마리가 빠르게 빗물을 털어내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경이로웠다. 피사체의 선명도를 고라니에게 맞춰둔 것처럼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빗물에 반사된 모습은 수려하고 빛이 났다. 털의 입자에서 맺히고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이 어쩌면 저리도 선명할까. 선영은 발뒤꿈치를 최대한 들어 장면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았다. 골짜기는 들짐승처럼 거칠게 빗줄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방 남자의 기침 소리가 이어지고 굴뚝에는 할머니가 아궁이에 피어올린 장작 연기가 거뭇거뭇 산사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바람과 세월에 꺾인 잣나무를 산에서 굴러와 아궁이 곁에 투박하게 분지르며 쌓든, 할머니의 굽은 등과 거친 손마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선영은 놀랍도록 놓치지 않았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