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를 뚫고, 마을로 갔던 법진이 돌아온 소리가 선영의 방안으로 더 크게 전해졌다. 할머니가 법당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어이쿠 스님, 욕 봤심더. 비가 잠잠해지면 올라 오시지예. 서둘러도 절은 그 자리에 있는데예.-그러게 말입니다. 제 때문에 보살님이 문밖에서 오소소 떨고 있을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하하하. 그 마음을 아는지 비도 착해지기 하든데요.선영은 빼꼼히 문을 열어 정말 군것질꺼리를 사왔는지 얼굴만 내밀었다.-주지스님, 수고하셨습니다.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종아리에 묻은 물기를 털고 있던 법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적당한 군것질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초코렛을 사왔네요. 이건 보살님, 이건 선영님, 설마 초코렛 싫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려나. 그렇죠? 하하하.선영은 몸을 일으켜 법진에게 다가갔다. 법진이 건네준 초코렛을 할머니와 마루턱에 앉아 또각또각 분질러 먹었다. 그러면서 방안에 있는 법진을 향해 크게 말했다. -전 사실 초코렛을 싫어해요. 그렇지만 여긴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먹긴 먹는 다구요. 할머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죠? -난 싫고 말구도 없심더. 그냥 스님이 주는 거면 양잿물도 마심니더.법진은 존재를 알리려는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입안에서 달달하게 녹아들어가는 초코렛을 음미하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선영에게 간지럼 먹히며 재잘재잘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할머니, 제 옆방에 사람이 든 모양이네요?-한 눈에도 아파 보임니더.-누가? 아, 제 옆방 사람이 말이죠?-요양 차 두세 달 묵고 가려고 짐을 풀었는데 개운치 않심더. 말기인 것 같아. 세상에 인연 줄을 끊고 있는 중이래. 새파란 목숨이 얼마나 억울할까. 사람은 참하게 생겨 법 없이도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더만. 업보라고 하기엔 사람이 너무 순딩이처럼 생겨 억울하고 운명이라고 하기엔 그 또한 벼락 맞아도 시원치 않을 억울함이제. 암만. 선영은 방으로 들어왔다. 가끔 바람은 잔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세상은 달그락거림으로 포화상태에 놓여 진 것 같았다. 내가 아니면 가족 중 누군가가, 이웃 중 누군가가, 인연이 닿는 누군가가 서서히 세상 밖으로 떠밀려가는 모습을 참관하게 되는 기막힌 증인석에 앉게 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모습을 궁금해 하기도 하면서 내 증인석의 빈자리는 누가 채워줄 것인가, 의문을 가지면서. 문득 골짜기의 어미 새와 품고 있던 알들의 생사가 궁금해지는 시간, 옆방의 남자 기침소리가 작고 날카롭게 들려왔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면 얼마나 두렵고 암담하고 서글퍼질까. 옆방 남자는 희망의 불빛이 꺼져 어두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