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방안에 한사람이 있다고 치자. 방문을 열고 싶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방안에서, 내내 침묵하는 외톨이를 누가 그려본 적이 있는가. 귀를 닫고 눈도 열리지 않는, 그리고 숨통마저 고르게 트이지 않는 채로 가슴에 무게를 단 한사람이 지금 옆방에 있다. 가난한 시간을 경영하며 절망의 바퀴에 몸을 맡기고 있다. 깊어진 병으로 얼마 살지 못하는 선고를 받고 더 이상의 책갈피를 펼칠 건더기도 접어둔 채 무력한 모습으로 침몰하고 있다. 단지 화려한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어쩌면 그의 유일한 낙일지도 모른다. 선영은 밤바다 백사장에 간간히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몸을 뒤척거렸다. 물속과 물 밖의 온도의 차와, 표면에 닿는 낯섦과, 달라진 풍경으로 멈출 수 없는 푸득거림은 온전히 선영의 몫이었다. 그러면서 옆방 남자의 아픔을 공유하려는 따뜻한 씀씀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간간히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으로 희망을 얘기하고, 기적을 남자는 소망했다. 시한부 삶은 남자의 시계소리를 한층 확대되어 들려줄 것이다. 이미 일정한 리듬은 깨어졌다. 어디에도 부드럽고 순하고 깨끗하고 착한 음성과 모습은 없을 것이다. 아웃사이더로 내몬 세상의 원망은 커지고 자신의 존재는 한없이 작아졌을 것이다. 무엇을 시작하거나 꿈으로 다져두기에는 벼랑 끝 인생이 너무 서글플 것이다. 양보하고 포기하고 묵살하면서 스스로를 늪 속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의 마감을 준비하고 있을 옆방 남자에게 도움이 될 무엇을 선영은 찾고 있었다. 더 이상 문틈으로 희망의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을 때, 삶은 철저히 자신을 고립할 것이다. 무슨 말을 들어도 위안이 되지 않으며 고독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짓밟히고 말 것이다. 선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옆방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잔기침 소리가 멎은 듯 했다. 덜컥, 두려워졌다. 생사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으나 다행히 비는 멎어있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마루 위를 총총 거려 옆방 앞에 섰다. 막상 방 앞에 이르렀으나 어떻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간다든지, 불러본다든지, 무엇 하나 선명하지 않는 채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선영은 창호지를 뚫어 구멍 속으로 방안을 살피기로 했다. 침을 바르지 않아도 적당히 습기에 젖어있었다. 검지가 앞을 나섰다. 곧게 뻗어 창호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검지의 끝에 힘을 실어 서서히 파고들어갔다. 창호지의 바닥에 닿았을 때 뭔가 얇고 허접한 기운과 부딪힌 순간이 있었다. 곧 구멍하나가 생겼다. 선영의 손가락 굵기에 맞는 구멍은 방안의 어둠을 채워 넣고 있었다. 한쪽 눈으로 그 어둠을 받아냈다. 어둠의 속살 사이로 어렴풋하게 방안의 풍경이 쏙쏙 모습을 드러냈다. 옆방 남자는 좁은 어깨로 웅크리고 있었다. 약봉지와 물주전자가 보였다. 책 몇 권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속을 드러낸 가방이 구석에서 붙박이처럼 놓여있고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탁상시계가 남자의 시간을 다스리고 있었다. 약간 각도를 달리하여 시선을 옮기자 손거울이 보였고 상표가 붙어있는 나이키 운동화도 보였다. 선영은 또 다른 세상을 엿보는 듯 새롭고 활발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