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경상좌도(嶺左) 일로(一路)의 적들은 영천을 요충지(要路)로 여겨 수만의 병사들을 주둔시켜 사방으로 노략질(抄掠)을 함으로써 조령 아래 한 지역의 백성들은 피해를 입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영천의 선비(儒學)인 정대임은 충분강개(忠憤慷慨)를 이기지 못해 재종제인 (정)대인과 먼저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키니, 고을 가운데의 뜻있는 선비인 조희익, 조성, 신준룡, 정천리, 정석남, 최인제, 김대해, 김연, 이득룡, 이번, 이영근 등 60여인이 호응(響應)하므로, 나 또한 분연히 적개(敵愾)의 뜻이 있어 곧바로 족제(族弟)인 (정)대임의 의병진(義兵陣)으로 가서 드디어 격문으로 의병들을 불러 또한 정예병사 수백 명을 얻었다.
5월초 대동에서 적을 격파하고 정천리로 하여금 (경상좌도)병마절도사인 박진에게 보고하게 하자 (박)진은 크게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즉시 (정대임에게)복병장 첩(帖)을 수여하자 휘하의 사졸(士卒)인 신준룡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군관의 소임이 어찌 서생(書生)에게 합당하겠는가? 정대임은 이로부터 의병대장일진대 또한 어찌 복병장의 칭호를 쓴단 말인가?”라고하자 (정)대임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함에 남에게 굴복당한들 무슨 욕이 되겠습니까?”하고 드디어 이온수, 정천리 등으로 하여금 난을 피해 도망간 백성들을 수색케 하여 (그들에게 자신의)생명을 버려 적을 섬멸하는 뜻으로써 깨우쳐주자 감격하여 눈물을 뿌렸으며 (이렇게)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여 10여 일 동안에 900명을 모았다.
당시 병사 박진은 의병의 숫자가 많은 것을 꺼려 억제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여러 의병들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지사(志士)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이에) 정대임, 정담은 족형 정세아, 조희익, 곽회근 등과 더불어 초유영(招諭營)에 글을 올려 자세하게 그 상황을 말하면서 절제(節制) 받들기를 원한다고 하자, 초유사인 김성일이 칭상(稱賞)하기를 마지않으면서 드디어 모든 의병장들로 하여금 각기 그 무리들을 이끌어 절제(節制)를 엄히 하게 하였다. 6월에 (정)대임은 정천리로 하여금 성황산 위에 잠복케 하고 이번에게는 봉천원에 잠복케 하여 왜적의 형편과 움직임을 몰래 정탐하도록 하였더니, 조금 후 정천리가 뛰어와 말하기를 “적이 많이 온다”고 하기에, 즉시 이번과 조덕기 등으로 하여금 고을(郡) 북면(北面)의 요로처(要路處)에 잠복케 하여 (적들을)기다리도록 하였지만 (마침)이날은 운무(雲霧)가 가득 끼어 간망(看望)이 불가하였다.
7월초에 왜적300여명이 신녕(으로 가는) 요로(要路) 상에 나타나 날이 저물자 (왜)적들이 북습(청통)과 와촌 등지에서 분탕(焚蕩)질을 하였는데, (정)대임은 (왜적들이)돌아올 길을 예측하고 당지산(唐旨山) 영천시 화산면 당지리에 있는 산 이름. 에 잠복해서 기다렸더니 이날 저녁 과연 적이 이르기에 아군은 적 20명을 사살하고 40명을 참수(斬首)했으며, 또한 거림원 임진왜란 이후에는 없어진 역(驛)이름. 위치는 현 영천시 화산면 부계 마을 동쪽 신녕천 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에 복병을 배치하여 오고가는 (왜)적들을 막았다. 마침 어사(御使)라고 호칭하는 왜적이 있어 군위로부터 말을 달려 신녕을 지나갔으며, 7월 14일에는 박연(朴淵:악박새) 영천시 화산면 석촌리 마을 동쪽의 절벽을 가리킴. 에 진격하였다. 당시 신녕 의병장 권응수, 의흥 복병장 홍천뢰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또한 왔기에 드디어 권응수 등과 세력을 합하여 추격하여 대파하였으니 (적의 머리를)벤 것이 40여급(級)이며 뺏은 창검과 우마(牛馬) 등 수가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고 나머지 적들은 각기 흩어져 도망하여 일부는 의흥으로 향하고 일부는 하양으로 향했는데, 권응수, 홍천뢰 등은 의흥 방면으로 추격하여 소계까지 가서 격멸하였고, 정대임과 정담 등은 하양방면으로 추격하여 와촌까지 가서 깨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