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유사 P647의 기록이다.『檀紀(단기)4259, 西紀(서기)1926, 丙寅(병인)3월에 정순기와 정래의는 高山流水(고산유수)에 생애를 붙이고 구름같이 정처 없이 배회하다가 曲江(곡강) 한 구석에서 滄浪之歌(창랑지가)로써 세월을 보내는 조성목을 심방하여 主客(주객)이 서로 기뻐하면서 客(객)이 탄식하기를 跋涉湖嶺身無依(발섭호영신무의) 千驚萬恐悽復悲(천경만공처부비) 寂寞江山春復到(적막강산춘부도) 忠魂義魄有誰慰(충혼의백유수위)[호남과 영남을 돌아다녀도 이 몸 하나 의지할 곳 없으니 일천의 놀람 일만의 두려움에 처량코도 슬프네. 적막한 이 강산에 봄은 다시 찾아왔지만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은 뉘 있어 위로하나] 주인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뿌리고 두 사람을 위안한다. 그대들의 의사는 나와 더불어 紹恢(소회) 일반이다. 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분들의 사적을 영원히 이 세상에 표창 못하면 아직까지 殘命(잔명)을 보존하고 있는 우리들이 九泉(구천)에서 대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 主客(주객)은 悲痛(비통)을 억제하고 이 자리에서 선열을 追慕(추모)할 추모계를 조직하여 參同契(참동계)라 이름하고 그날부터 2객은 각 방면으로 방문하여 참동계원을 모집하다.』참동계는 모금활동을 진행하던 중 왜경에게 발각되어 핵심 인물들이 서류 일체를 소각하고 피신과 체포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그간의 적립금을 충효재 건립에 썼다. 유사 P627에는 1913년에 영천지역에서 추모계가 창립되었고 1933년에 충효재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아마도 1923년은 1933년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어찌됐든 1946년 2월 15일에 서울서 내려온 광복회 대표들과 영남 각지의 사회단체, 유림단체, 문중단체, 시민단체, 학생단체 등이 죽장면 입암시장에서 산남의진 순국장병의 위령제를 지냈고, 그 해 창의지(倡義誌) 일백 질을 발간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지금 산남의진은 일반에 잊혀버린 역사가 되고 만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다. 다행히 지난 연말에 창의지 원본을 얻게 되었으니 하루빨리 산남의진창의지 번역본을 일반에 널리 유포하여 보급하는 일이 나의 역사적 사명이 되었다.권대진(權大震) 義士자는 경조(景祚), 관향은 안동(安東). 처음에 영산(靈山), 밀양(密陽)지방을 책임지고 소모(召募)하였고 후에 참모장(參謀將)으로 활약하다가 의진이 흩어진 후 은신하였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3> <山南倡義誌 卷下 P56> 1990년 애국장 추서. 김안동(金安東) 義士관향은 월성(月城). 출신지는 청송(靑松). 청송지방 연소모(連召募)하여 서종락과 더불어 인사를 모집하여 본진에 보냈고 후에 최세윤 대장을 따라 활약하더니 그후 전말(顚末)은 불상(不詳)이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3><山南倡義誌 卷下 P57>김도언(金道彦) 義士벼슬은 사과(司果), 호는 박천(博川). 더러 박천군수라 불렀다. 처음에 대구현풍 지방을 책임지고 소모(消耗)하였고, 도총장(都總將)으로 활약하였으며 후에 피금되어 대구에서 옥사(獄死)하였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0><山南倡義誌 卷下 P57~58> 박태종(朴泰宗) 義士관향은 불상(不詳). 의성(義城)출신. 처음에 안의(安義)지방에서 기병하여 부하 백여 인을 인솔하고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도총장(都總將)으로 활약하다가 입암전투에서 패한 후 동엄선생의 승인을 받고 다시 안의지방으로 돌아가서 활약하더니 전말(顚末)은 미상(未詳)이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4><山南倡義誌 卷下 P58> 김태언(金太彦) 義士관향 미상(未詳), 청송 출신. 의진 초기에 청송지방으로부터 다수의 군기(軍器)를 모아 입진하고 각지의 소모(召募)로 활약하더니 전말(顚末) 미상(未詳)이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4><山南倡義誌 卷下 P58>정완성(鄭完成) 義士관향은 영일(迎日). 본래 장기(長鬐)사람으로서 영천에 이거(移居)하여 입진한 후 각지 연락과 군수품 모집을 하였고 후에 피집되어 형기를 마치고 만주로 이거(移去)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4><山南倡義誌 卷下 P58>박경화(朴敬化) 義士관향 미상(未詳). 영천 자양면 도일(道日)에 우거(寓居). 처음에 장기(長鬐) 지방을 책임지고 소모(召募)하였고 입진하여 좌포장(左炮將)으로 활약하다가 피집되어 형기를 마치고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4><山南倡義誌 卷下 P58>남복수(南福洙) 義士자는 경도(景都), 관향은 영양(英陽). 입진하여 과감충용(果敢忠勇)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병이 들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죽으니 이것이 애통할 따름이다.” 하고 귀가하여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5><山南倡義誌 卷下 P58>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 추서박용운(朴龍雲) 義士벼슬은 참봉(參奉), 관향은 밀양(密陽). 산남의진이 일어나자 구한서, 안수원 등과 포수들을 모집하여 입진시키고 청도 창녕 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으며 진두에서 활약하더니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5><山南倡義誌 卷下 P59>최익문(崔益文) 義士자는 주서(周瑞), 관향은 월성(月城). 포항 죽장 출신. 산남의진에 입진할 때 농우(農牛) 2두를 내어놓아 호군(護軍)하였고, 후에 청송동부진을 원조하다가 전 재산을 탕진시키고 의진이 무너지매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5><山南倡義誌 卷下 P59>윤용식(尹龍植) 義士관향은 파평(坡平). 청송 출신 본진의 종사(從事)로 활약하다가 후에 청송동부진에서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였고 고와실(高臥室) 전투에서 패전한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5><山南倡義誌 卷下 P60>남시철(南時喆) 義士자는 이길(二吉), 관향은 영양(英陽). 일족인 남석우(南錫祐) 등과 동시에 입진하여 본진에서 활약하였고 후에 청송동부진에서도 활약하다가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6><山南倡義誌 卷下 P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