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부터 (우리 의병)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치고 적들의 세력이 꺾여 사람들의 뜻이 점차 강해져서 적들을 공격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져서 적들은 감히 함부로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정대임은 드디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적이 연속적으로 패전하여 겁을 먹고 첩보활동을 하지 못하고 또 뒤에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 인하여 영천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을 공격하여 물리치도록 합시다”고 하고 막하의 병사를 보내어 어느 날 (영천)성을 포위할 뜻을 여러 고을에 통지하여 구원을 여러 의병진에 요청하였다. 23일 진(陣)을 고을의 남쪽 추평에 벌려 화공(火攻)의 대비를 갖추어 군졸들로 하여금 미리 땔나무(柴草)를 구하여 몰래 (영천성의)서북쪽 문 밖에 쌓아두게 하고 목책(木柵)과 얽은 긴 사다리로 성벽을 넘는 도구로 삼았으며, 또한 용감하고 건장한 사람들을 가려 뽑아 고을의 서쪽 봉우리에 올라가 적의 무리들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다소(多少)의 적들이 성 밖에서 말을 달리기도하고 혹은 곳곳에 벌떼와 개미떼처럼 모여 있어 그들의 수효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권응수와 신녕 현감인 한척은 신녕으로부터 병력을 이끌고 왔고 홍천뢰 또한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 24일 하양 의병장 신해와 하양현감 조윤신, 자인의병장 최문병, 경산의병장 최대기, 경주판관 박의장 등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또한 모이니 모두 3,560여명이었다. 이때 의성의 감사졸(敢死卒)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사대. 500명이 와서 (병력을)보태기에 이들을 나누어 부서(部署)하였다. 문무(文武)의 사나운 군사(鷙悍)들 수백 명이 모두 추대하기를 권응수를 별장(別將)으로 신해를 좌총(左總)으로 최문병을 우총(右總)으로 정대임을 중총(中總)으로 홍천뢰를 선봉장(先鋒將)으로 본 고을(영천)의 군수인 김윤국을 별장(別將)으로 진사 정세아, 정담을 찬획종사로(贊畫從事)로 삼고, 깃발에다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라 써서 진중(陣中)에다 세우니 진세(陣勢)가 엄숙하였다. 드디어 깃발과 북(旗鼓)을 설치하고 정대임이 여러 장사(將士)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나아가 인사드리게(進謁)하고 인하여 명령을 내리기를 “지금 행조(行朝) 당시 한양의 궁성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조정. 즉 의주에 있던 선조의 조정을 가리킴. 가 멀리 (우리나라)서쪽 변두리에 있어 (조정의)명령이 통하지 않는데, 이때를 당하여 군중(軍中)의 율령(律令)이 엄격하고 치밀(嚴密)하며 정숙(整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왜적을 토벌하던 날 임진왜란 초기. 은 비록 혹 명령을 어기고 절도를 잃은 자가 있어도 일이 시작되는 초창기여서 짐짓 그 허물을 용서하겠지만, 지금 (영천)성에 웅거하는 적은 그 수효가 매우 많고 뿌리(根底)가 이미 깊어 우리 외로운 군사들이 마치 지난 예(前例)를 따름으로써 큰일(大事)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우리 장졸(將卒)들은 같이 약속하여 맹서로서 말하노니 “겁을 집어먹고 어지러운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베고, 적을 보고 5보 후퇴하는 자도 목을 베며, 자기마음대로 행동하고 장수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도 목을 베고, 전쟁에 임하여 대오를 잃은 자도 목을 벤다.”고 하자 이에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응하여 군중에서 장군의 명령을 듣고 “감히 어김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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