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호는 공격적으로 쥐고 있던 의자다리를 아래로 내려놓으려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막다른 골목에서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모든 털을 곤두세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 전투태세에 돌입한다는 비장함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우상열은 불씨를 지폈다. -범호아저씨, 아자아자! 이웃청년의 날카로운 눈빛이 우리에게 꽂혔다. 우리는 머뭇거렸지만 우상열은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자 범호가 힘을 얻었는지 약간은 여유가 생긴듯했다. -야, 한 놈씩 덤비면 나도 무기를 내려놓을게. 어때? 일대일 맞짱. 앞에 나서던 청년이 뒤에 버티고 있는 네 명의 응원군을 쳐다봤다. 어떻게 할까? 눈으로 물었고, 니 꼴리는 대로 해라는 대답을 읽었는지 청년은 웃통을 벗었다. -얌마, 무기 버리고 맨손으로 붙어보자. 우리는 기습적인 싸움 외에는 꼭 웃통을 벗는 절차를 거치는 것을 종종 봐왔다. 어쩌면 씨름의 영향도 있지만 몇 벌되지 않은 옷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꼭 누군가 나서서 벗어놓은 옷을 챙겨 들고 있거나 안전한 곳에 가져다 두고 싸움에만 전력을 다하라는 배려가 숨겨있는 듯도 했다. 우상열은 범호 뒤에 붙어 섰다. 옷을 받아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범호는 옷을 벗지 않았다. 의자 다리만 내려놓고 이단차기 자세로 다리를 벌려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우리는 범호 엄마 배상희가 색시 장사로 떼돈을 벌었다는 어른들의 말을 떠올리면서, 충분히 옷 한 벌 정도는 버려도 될 돈의 위력에 공감하고 있었다. 청년은 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덤벼들었다. 범호가 몸을 조금 뺀다 싶더니 복부를 향해 어퍼컷이 날아갔다. 정확히 꽂혔다. 복부에 맞아본 사람만 아는, 잠시 숨을 못 쉬고 깊은 통증으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 수순이었지만 청년은 버티고 있었다. 스펀지주먹이었는지 태어날 때부터 강철 복부로 태어났는지 청년과 범호는 서로 잠시 멈춘 채, 눈이 마주쳤다. 곧 청년의 머리가 범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프로레슬링 시합이 티비에서 방영되는 날이면 마을전체가 한적해졌다. 오직 만화방 안은 동네 부지깽이도 자리를 잡고 주인 눈치 보랴, 김일의 박치기 보랴 북적북적 거렸다. 그래서인지 박치기로 기선제압을 하는 것은 싸움의 첫걸음이었다. 발차기, 주먹치기보다 박치기 한 방은 프로레슬링 광팬이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고 김일에 대한 예우차원의 존경심이기도 했다. 마치 농구로 치면 삼 점 슛과 같았다. 범호의 복부 꽂기로 혹시 이긴다 해도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하지만, 박치기는 보는 사람에게 후련함과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는 것이다. 청년의 박치기가 스치듯 비껴갔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속에서 담고 있어야 할 말이 불쑥 비어져 나왔다. -머시따!복부를 견딘 청년과 가까스로 박치기를 피한 범호가 다시 대치중일 때, 우상열은 ‘머시따’에게 심한 눈총을 주었다. 누구를 응원하고 있냐. 병신아! 단지 범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박치기를 흠모한 것도 죄냐? ‘머시따’가 툴툴거렸다. 우리는 역도산의 ‘가라데 촙’보다 김일의 박치기에 환호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