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정사는 옛 건축물에 있어선 단연 돋보이는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항상 물이 흐르고 사계절이 분명한 연못가 암반위에 대청마루를 만들어, 물소리 가득한 자연정취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무더운 여름에도 대청마루에서 학문에 정진할 때 시원한 바람을 선물해 놓은 것이다. 눈웃음이, 남간정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유물관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지리도 밝지 않기에 죽자고 눈웃음과 동행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던 터라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물론 그가 까탈스럽거나 자신의 주장이 강하여 억지스럽게 밀어붙이는 그런 유형이 아니라는 이유가 더 컸다. 한 발 앞서 걸으면서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고 혼자 껄껄 웃었다. 자연스럽게 악수를 했다. 올해 정년퇴직을 앞둔 공무원이고 우상열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공무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몇 가지가 일치되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쉽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무언가를 결정해야하는 자리에는 뒤에 빠져있었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적당한 중간 대열에서 머릿수를 채워주다가 해산하는 우유부단한 성향을 대체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진안 정수장을 오르는 길목에서 만난 고라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줄 때도 역시 무리 속에 섞여 뒤처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보폭이 맞혀졌을 때 막걸리를 건네며 급속도로 아는 체를 했지만 여전히 공무원의 간격을 유지했다고 판단했다. 나쁜 의도로 공무원을 사칭하여 접근해 왔다면 내 마음이 굳게 닫혔을 건데, 왠지 공무원이라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분명한 신분을 가졌다는 것이 확실히 경계를 무너뜨리고 한 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유물관 정중앙에는 우암의 초상화가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췄다. 한동안 우암의 눈빛을 읽어내기 위해 눈동자를 맞추었다. 깊게 패인 주름살과 완강한 골격은 수려한 이목구비를 떠받쳐주고 있었다. 굵은 갈색의 붓의 터치가 한사람의 의지를 저토록 명료하며 간결하게 전달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표현력의 진중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짙은 눈썹과 구레나룻, 턱수염으로 이어지는 선비의 기개가 우상열에게도 틀림없이 울림이 있었을 것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다시 만난 전우처럼 덥석 손을 맞잡았다. 그 감동을 읽었기에 굳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넉넉한 선비의 평상복 안으로 숨겨진 우암의 당당하면서도 강인한 골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계절 내내 찾아오는 사진작가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를 남간정사는 말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힌 듯 올라오는 봄꽃 가득한 산천과, 한 양동이식 엎질러 놓은 우거지는 여름의 녹음과, 단풍 빛에 담겨 가부좌를 틀고 반신욕으로 한옥의 정취를 더하는 가을과, 눈꽃을 피우는 겨울이라는 솔깃한 세월의 자국이 사진작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한 번도 다녀가지 않는 작가는 있어도 한번 다녀간 작가는 없다는 남간정사에서 우암의 삶과 신념과 의지를 꼬깃꼬깃 접어 가슴에 담았다. 어느 한곳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할 뜨거운 감정이, 송시열선생의 숨결과 발자취가 올곧은 정신으로 거듭나는 현장에서 넝쿨처럼 휘감겨 숙연해졌다. 여기까지 안내해준 우상열에게 고맙다고 이번에는 내가 눈웃음을 지었다. 바람이 억새풀을 흔들었다. 초겨울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