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다리를 접질렸다. 빗물이 고일 정도로 움푹 꺼진 곳에 발을 헛디뎌 순간 중심을 잃었다. 넘어졌지만 누가 볼세라 빛의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왠지 낯선 사람들에게도 헛발 내딛으며 넘어지는 모습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얼마나 만만해 보일까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만큼 왔으면 제 몸 하나 앞가림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크게 작용했다. 우스꽝스런 빠른 동작에 못 본 척 몇 사람이 지나쳐갔다. 복숭아뼈 쪽에 약간의 통증은 있었지만 커브 길을 돌아 확인해보려고 꿋꿋하게 걸었다. 아침 햇살이 탱글탱글했다. 늘 다니던 산책길인데 순간적으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처럼 새소리, 물소리가 촘촘하게 들려왔다. 그랬다. 틀에 갇힌 세상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금의 여유도 없이 새벽 다섯 시면 알람에 맞춰 일어나 집을 나섰다. 산책이라는 하루 계획의 시작점에서 불만도 없이 투정도 없이, 눈과 비가 오더라도 묵묵히 나선 십 수 년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마치 태엽으로 가는 장난감처럼 앞으로만 내딛은 것은 아닐까. 이제껏 눈과 귀를 열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쓰레기 매립장까지 걸어와, 허리 돌리기 운동기구를 잡고 몇 번 용을 쓰다가 돌아가는 다람쥐 쳇바퀴에 익숙해 있었다. 계절도 느끼지 못하고 새소리, 물소리에도 인색한 모습으로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인간이, 갈래 길 도로 반사경 볼록 거울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마와 코와 입술이 툭 불거져 나와 코믹하게 보였지만 한 번도 호탕하게 웃어본 적이 없는 삐에로처럼 슬퍼 보였다. 잠시 편편한 돌에 마음의 기복이 심한 나를 앉혔다. 복숭아뼈 주변으로 약간 부기가 있었지만 그다지 심각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풍경을 즐겨보려고 한껏 눈과 귀를 열었다. 꼭 그렇게 각박했어야만 했냐고, 이렇게 여유를 갖고 허리띠도 풀고 살아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속도는 유지되었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오년 전 현대자동차 1차 협력업체에서 근무 중 명예퇴직을 권고 받고 옷을 벗었다. 현장에서부터 한 계단씩 힘겹고 올라간 부장 직함을 내려놓기 까지 억울함도 있었지만, 이미 그들의 결정을 뒤집을 수 는 없었다. 전무를 향해 울분을 분출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음날은 출근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은 출근하여 조용히 내 짐을 쌌다. 37년 세월의 짐이, 종이 3호 박스에 담겨져 가슴에 안았을 때 무게감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는 괜히 멋쩍게 웃으며 배웅하는 직원들 사이로 뒷모습을 남기고 빠져나왔다. 어깨가 굽어 구부정하고 패잔병의 비루한 뒷모습을 혹여 기억되지 않았을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당당한 모습을 보이면서 출입문을 열고 나오기는 그 누구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허리만이라도 세운 뒷모습이라면, 뒤꿈치라도 든 걸음걸이라면 적어도 몇 년이 흐른 자신들의 모습일지 모를, 내 모습에서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흐트러짐 없이 빠져 나왔다. 어쩌면 흐트러짐 없이 빠져 나왔다는 것은 온전히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른다. 나는 그만큼 비틀거렸고, 나는 그만큼 암담했고, 나는 그만큼 좌절했다. 앞으로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날갯짓은 내게 허락되어 있을까. 반환점을 돌아 시간의 트랙에서 더 멀어져 있는 내가 존재할 뿐, 어쩌면 거슬러 올라가는 역동적인 솟구침은 퇴화됐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