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열전14에서 언급했던 일을 또다시 쓰게 될 줄은 못했다. 하지만 쓰지 않을 수 없다.《열자(列子)》<황제편(黃帝篇)>의 고사(故事), “중국 송(宋)나라의 저공(狙公)이 자신이 키우는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내므로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를 주겠다고 바꾸어 말하니 기뻐하였다.” 조삼모사(朝三暮四)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서고 독립유공자 선양의 노력에 내심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의 행정은 아니다. 이제까지 산남의진 선열들을 위한 추모행사비로 500만을 지원하다가 2019년에는 480만원, 그리고 올해는 400만원으로 낮춰서 지원한단다.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한 정용기 대장이 일으킨 산남의진인데도 말이다. 담당자의 변명인즉슨 전체적으로 예산이 18% 삭감됐단다. 아랫돌 빼서 윗돌로 쓰면 머지않아 제방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김일직(金日直) 생존기간:1869~미상 / 출생지:경북 의성 / 운동계열:의병 / 훈격:애족장(2008) 공적내용 : 경북 의성 출신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한 청송의 이석이의진(李石伊義陣)과 의성에서 활동하였던 김도총의진(金都總義陣)에서 활동하였다. 이석이는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조직한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1907년 9월 초 영일군 죽장면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독자적으로 의병진을 편성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이석이의진은 1907년 9월 이후부터 1909년 10월 2일 청송군 현동면(縣東面) 도평(道坪)에서 체포될 때까지 청하·영천·청송 등지에서 군자금의 모집과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김일직은 1909년 7월경 청송군 일원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석이의진에 참여하여 청송군 현동면(縣東面)과 부남면(府南面)의 산 속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동년 8월경에도 청송군 부남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동년 10월 의병장 이석이가 체포된 후에는 의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도총의진에 참여하여 의성군 춘산면(春山面)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김일직은 1910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10. 1. 21) 노명이(盧明伊) 생존기간:1883~1908.2.21. / 출생지:경북 의성 / 운동계열:의병 / 훈격:애국장(2006) 공적내용 : 경북 의성(義城) 출신으로 박연백 부대(朴淵伯 部隊) 소속의 소부대를 이끌었다. 박연백은 의성군 춘산면(春山面) 효선리(孝仙里) 출신으로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의성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박연백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창의하여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수십 명을 사살하는 등 의성·의흥(義興)·영천(永川)·청송(靑松)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1907년 10월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입암전투(立巖戰鬪)에 참여하였다가 패한 뒤 다시 의성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박연백은 수하에 김반석(金盤石) · 장학이(張學伊) · 이신산(李新山) 등을 거느리고 의성 · 청송 일원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대응하여 유격전을 감행하다가 1909년 11월 20일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노명이는 일찍이 박연백 부대에 참가하여 수하에 의병 16명을 거느리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19일 노명이 등 4명의 의병들은 의성군 옥산면(玉山面)에서 군위수비대(軍威守備隊) 토벌대와 충돌하였는데, 3명은 탈출하고 노명이는 흉부에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노명이는 동년 2월 21일 오후 7시 사망 ·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資料 9 義兵篇ⅱ 18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