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성두(淸河城頭)에서 박일천(朴一天) 근고(謹稿) 조상(祖上)으로 이어받은 단군(檀君)의 이 터전을, 피흘려 지켜 후손(後孫)에게 전하려다 / 왜병(倭兵)의 총칼앞에 무참하게 숨진 목숨, 관덕송(官德松) 그늘 아래 말없이 누워있네 / 해아현(海阿縣) 이 고장(故莊)에 뜻 있는 사람 없어, 산남의진(山南義陣) 충혼의혼(忠魂義魂) 향화(香火)도 두절(杜絶)일세 / 북동대(北東岱) 검은 구름 만고(萬古)에 시름이요, 조경대(釣鯨臺) 성낸 파도 가슴치며 통곡하네. <출처:山南義陣遺事 626p 第7編 追慕槪況 第1章 追慕文獻 第4節 追墓山南義陣>모충이(牟沖伊) 생존기간:1883~1960.4.19. / 출생지:경북 청송 / 운동계열:의병 / 훈격:애국장(1990) 공적내용 :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6년 3월 산남의진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의 휘하로 입대하여 활약하였다. 1907년 10월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고 이어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정환직(鄭煥直)마저 순국하자 산남의진은 흩어져 각기 활약하게 되었다. 1908년 6월 박신재(朴新材)와 그밖에 수 명과 더불어 총검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경상북도 청하(淸河) 세목동장(細牧洞長)으로부터 20원을 군자금으로 모금하고, 그 후 귀가하여 있던 중 1908년 8월 3일에는 일본 측의 밀정으로 활약하던 청하군의 소사(小事) 정말범(鄭末凡)을 살해하였다. 이 일이 적에게 적발되어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영일군 관학산(冠鶴山)에서 체포되었다.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암살 및 강도혐의로 종신형을 언도받고, 9월 29일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 당하였으며, 10월 20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12년 소위 칙령 제23호에 의하여 징역 12년형으로 감형 받았으며, 다시 1916년 소위 칙령 제104호에 의하여 징역 9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대구지방재판소 판결문 (1908. 9. 4) ·대구공소원 판결문 (1908. 9. 29) ·대심원 판결문 (1908. 10. 20) 박대중(朴大重) 생존기간:미상~1908.4.25. / 출생지:미상 / 운동계열:의병 / 훈격:애국장(1995) 공적내용 : 경북 경주(慶州)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늑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활동 · 종교활동 · 교육활동 · 학술활동 등을 통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박대중은 이 같은 시기에 경북 경주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대일 무력투쟁을 전개하다가 1908년 4월 17일 경주의 일본군 수비대 병사들에게 변경조(卞敬助) · 유원수(柳元守) 등과 함께 피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일 항전을 지속할 목적으로 4월 25일 이들 양인과 협력하여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제10집 470·4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