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馬)자가 들어간 중국 지명 중에서 필자의 모교인 산서대학교가 있는 산서성 태원시(山西省太原市)에 있는 마자가 들어있는 지명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음마하(饮马河)는 수로명이자 길의 이름이고, 서문가(西门街) 서남쪽에 있다. 명나라 때, 이곳은 지대가 낮아 물이 차서 강이 되었고, 서쪽 뒤의 작은 강과도 통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늘 이곳에 와서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하면서, 마침내 음마하(饮马河)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명초 진왕부(晋王府) 호위군이었던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무장군과 청의 주둔군은 모두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화민국(1912-1949) 때, 수로가 메말랐고, 인근 주민들은 마침내 도랑을 메워 집을 짓고 길을 형성한 후, `음마(饮马)`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후 음마하가(饮马河街, 街는 길)와 음마항(饮马巷, 巷은 작은 골목)이라 하다가, 해방 후 음마하가(饮马河街)를 음마하(饮马河)라고 약칭하였다. 현재 한서문(旱西门) 남쪽에 "음마항(饮马巷)"이라고 표시된 도로 표지판은 실제로 잘못된 것이다.
마도파(马道坡) 서쪽 시작점인 돈화남로(敦化南路)는 시가지에서 동산(东山)과 수양현(寿阳县)으로 이어지는 주요 간선도로이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 이곳은 원래 모래강의 강바닥이었는데 명말 청초에 완(阮)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는데, 그 이름을 따서 완가만(阮家湾)이라고 하였다. 후에, 성 안의 주민들이 석탄을 많이 사용해서 완가만(阮家湾)은 동산의 석탄이 도시로 들어가는 간선 도로가 되었다. 당시의 교통 운수 수단은 주로 마차인데다가 게다가 완가만(阮家湾) 일대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서 비탈 모양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길을 마도파(马道坡)라고 부르며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경마장과 양마장은 엄밀히 말하면 거리 이름이 아니라 두 개의 구역 이름이며, 또한 굴욕적인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1937년 태원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동성문(东城门) 밖의 도장골(道场沟), 가위만(剪子湾) 등 마을 서쪽의 장대평(将台坪)이라는 농경지에 양마장과 경마장을 지었다. 이곳에서 군마를 사육하고, 경마 오락을 했다. 경마장은 때때로 항일 지사를 학살하는 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의 돈화남로(敦化南路) 60호원에는 관마정(观马亭)이라는 옛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태원이 함락된 후, 일본군 장교가 신병을 보고 포로를 잡고 총살하는 훈련을 하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 가게 되면 마로(马路)라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사실은 이 지명은 말과는 관련이 없다. 중국의 길, 골목 명칭 단계에는 큰 거리, 거리, 길, 골목, 조, 리(大街, 街, 路, 巷, 条, 里)가 있고, "길(路)"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통칭인 마로(马路, 큰 길)가 있다. 마로(马路)는 말이 가는 길이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식 도로의 약칭도 아니다. 과거에 마로(马路)는 마음대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자갈로만 만들어지고 길 중앙이 약간 높고 매끄럽고 평탄하여 아스팔트가 그 위에 깔린 길이어야 마로(马路)라고 부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도로 포장 방법을 잉글랜드인 ‘존 마카단’이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중국인들은 이러한 길을 그 설계인의 성으로 `마카단로(马卡丹路)`라고 이름 붙였고 간략하게 마로(马路)라고 했던 것이다. 태원에서 마로(马路)는 주로 무기공장 근처와 흑토항(黑土巷) 근처에 집중되었다.
승리가(胜利街)에 있는 산서북 풍뢰(风雷)공업집단의 전신은 민국시대의 무기공장인데, 염석산(阎锡山)의 주요 병기 제조 장소였다. 공장을 둘러싸고 있는 몇 개의 도로도 "병공마로(兵工马路)"로 구별해서 명명되었다. 예를 들어, 병마동마로(兵工东马路), 병공남마로(兵工南马路), 병공서마로(兵工西马路), 병공중마로(兵工中马路) 등이다. 그러나 병공남마로(兵工南马路) 같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몇 마로(马路)는 이미 승리가(胜利街), 해방북로(解放北路), 오일로(五一路)로 합병해서 나눠졌다. 동산에는 석탄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 석탄들이 성내로 운반되는 길이 마도파(马道坡) 외에 바로 흑토항(黑土巷)이 있다. 당시 도로가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마차가 운반하는 석탄은 쉽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땅은 검은 석탄으로 검게 물들어, 흑토항(黑土巷)은 그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해방 후, 주민들은 이곳에 기숙사를 건설하고, 사통팔달의 도로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흑토항(黑土巷)에 방위어나 서수사를 더해서 이 도로들을 명명하였다. 예를 들어, 흑토항동가로마로(黑土巷东横马路), 흑토항서가로마로(黑土巷西横马路), 흑토항중가로마로(黑土巷中横马路), 흑토항일마로(黑土巷一马路), 흑토항이마로(黑土巷二马路), 흑토항삼마로(黑土巷三马路), 흑토항사마로(黑土巷四马路), 흑토항오마로(黑土巷五马路) 등이다. 흑토항일마로(黑土巷一马路)가 오룡구가(五龙口街)에 병입한 것을 제외하고, 다른 일곱 개의 마로(马路)는 비록 지명은 남아 있지만, 그러나 구역의 개조로 인해 실제는 이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외에, 쌍탑일마로(双塔一马路), 쌍탑이마로(双塔二马路), 동산마로(东山马路)도 " 마로(马路)"로 통칭되는 도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