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馬)자가 들어간 중국 지명 중에서 필자의 모교인 산서대학교가 있는 산서성 태원시(山西省太原市)에 있는 마자가 들어있는 지명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대마촌(大马村)은 본래 마촌(马村)인데, 명나라 때 군마를 기르던 곳으로, 경서 국도의 필경지(必经之地, 반드시 거쳐야 할 곳)였다. 후에 남쪽의 마촌(马村)과 구별하기 위해 각각 대마촌(大马村)과 소마촌(小马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는 소마촌(小马村)으로 명명한 소마서로(小西西路)·소마북가(小北北街)가 있다. 남마촌(南马村)은 마촌(马村)이라고도 불리며, 북쪽은 대마촌, 남쪽의 소마촌(小马村)을 남마촌(南马村)이라고도 한다. 남마촌(南马村)은 분하(汾河) 동쪽 기슭, 소하(潇河) 남쪽에 있는데, 물이 풍부하고 풀이 무성하여 명대에 군마를 사육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마촌(马村)이라고 명명되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마을 동쪽에는 말뚝이 있었고, 말뚝 남쪽에는 말에게 물을 주는 구덩이가 있었다. 영택구(迎泽区)에 마장(马庄)이 있는데, 이 곳은 옛날에 목초가 무성하여 말을 방목하던 땅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내에 방림사(芳林寺)가 있었는데, 태원시 성남(城南) 제일의 승경(胜景, 아름다운 풍경)으로, 후방림사 본당이 진사(晋祠, 태원시(太原市) 진원구(晋源区) 진사진(晋祠镇)에 위치하고 시내로부터 3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중국에 현존하는 제일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황가원림(皇家园林)으로 진나라의 종사(宗祠)이다)의 봉성사(奉圣寺)로 옮겨져 중건되었다. 마장(马庄)의 서쪽에는 만마가(万马街)가 있었는데, 마장(马庄)과 만산구(万山沟, 沟는 개천)를 연결하였기 때문에 후에 만산구(万山沟)로 병합되었다. 현재 마장촌(马庄村)으로 명명된 마장남가(马庄南街)가 있다.
행화령구(杏花岭区)의 뇨마촌(淖马村, 淖(진흙 뇨))의 내력에 관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말(隋末) 이연(李渊)이 산을 오르는데 비를 만나서 말이 진흙에 빠져 언덕 앞에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생긴 이름이다. 두번째는 송나라의 호가장(呼家将)이 전투를 할 때 이곳을 지나치는데, 공교롭게도 큰비를 만나 말이 진흙에 빠졌고 소요동(烧窑洞, 그곳에서는 속칭 호호동(呼呼洞)이라고 한다)에서 하루를 묵게 되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세번째는 명말(明末) 틈왕(闯王, 명조(明朝) 말년 농민 봉기군 영도자 이자성(李自成)의 칭호) 이자성(李自成)이 태원을 공격했을 때, 이곳에서 큰 비를 만나 말이 진흙에 빠졌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마파촌(马坡村)은 원래 이름이 마가파(马家坡)였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 한나라 때 마(馬)씨 성을 가진 가문이 가장 먼저 이곳에 정착하여 이름이 지어졌고 그후 후인들(人)이 간단하게 줄여 마파(马坡)라고 불렀다.
마두수촌(马头水村)의 전해 내려오는 유래는 상당히 많다. 그 중 첫 번째는 마을 남쪽 산골짜기에 동굴이 있었는데, 동굴벽 중 튀어나온 부분이 마치 말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다. 굴 안에 샘물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마두수(马头水)라고 불렀고, 역시 뒷마을 이름도 마두수(马头水)라고도 했다. 두 번째는, 고대에는 이곳에 물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이 물을 먹을 때에는 말(馬)을 이용해서 감초묘산(甘草峁山) 골짜기에서 실어 와야 했고,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마태수(马驮水)`로 지어졌다고 한다. 후에 마을 산골짜기에 샘을 하나 팠는데, 마을 사람들이 작은 못으로 모여들어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마시게 했고, 그 때 물속에 말머리 그림자가 비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연못을 마두수(马头水)라고 부르고, 뒷마을 이름도 마두수(马头水)로 바꾸었다. 세 번째는, 이전에 어떤 사람이 말을 이곳 산골짜기 낮은 곳에 말을 묶어 두었는데, 말이 끊임없이 발굽으로 땅을 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 여기를 깊이 파서 샘물을 얻었는데, 그 이름을 마두수(马头水)라고 지었고, 마을 이름도 마두수(马头水)라고 하였다. ** 사진 제공 : baidu.com** 필자 메이칭의 카페 : http://cafe.naver.com/orangewo8x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