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산남의진 정신 선양 학술회의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작년 12월에 신청한 국비보조 사업이 일부 감액되어 선정되었다는 전갈이 온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추모식도 연기된 상황에 처진 어깨를 다시 추슬러본다.󰡐산남의진의 재조명과 지역사회의 역할󰡑이라는 부제로 11월 5일 개최할 예정이다. 지방비 확보와 산남의진기념사업회 자체부담금 등 재원 확보와 행사 준비가 쉽지는 않겠지만 차근차근 잘 준비해서 산남의진 의사들의 정신을 널리 선양해 보려 한다. 윤팔룡(尹八龍) 생존기간: 1872.2.13.~1943.9.5. / 출생지: 경북 영덕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2015) 공적내용 : 1907년 경북 청하(淸河) · 흥해(興海) 일대에서 정용기의진(鄭鏞基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하면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정미의병항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정용기는 영덕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청하읍(淸河邑)을 공격하고 청송(靑松) ·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 일본군 3명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이한구와 더불어 매국 5적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체포하여 효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윤팔룡은 정용기 의진에 참여하여 1907년 9월 3일 청하군 청하분파소를 소각하고, 순검 박래호(朴來鎬)를 총살하였다. 1907년 10월 29일 흥해군 흥해분파소를 소각하고, 흥해우편취급소를 포위 공격하여 소장 등을 처단하였다. 1907년 11월 16일에는 흥해분파소 순사의 숙사를 공격해 일본인 순사 곤지(權次楮三郞)와 한인 순사 정영필(鄭永弼)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8년 8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內亂罪)로 유형(流刑) 10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ㆍ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 : 1908. 8. 7) ㆍ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권 426~427면윤흥곤(尹興坤) 생존기간: 미상 ~ 1910. 10. 31 / 출생지: 경북 봉화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독립장(1995) 공적내용 :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정환직(鄭煥直)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 주구배를 처단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윤흥곤은 이 같은 시기인 1907년 정환직 의진에 투신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기 삼남관찰사를 지낸 중추원 의관을 제수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자,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진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면서 일제 식민기관을 습격 방화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순국한 의병장이다. 윤흥곤은 이 같은 정환직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1백 수십 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1907년 10월 29일 경북 흥해군(興海郡)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고 소장 일본인 시원위태랑(市原爲太郞)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한 돈 3백여 원을 군자금으로 압수하고 근처에 있는 경무분파소 및 기타 13동의 집을 소각시켰다. 아울러 그는 같은 해 11월 3일 신령군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기 1백 수십 정을 노획하고 경무분파소 및 순검 박재진(朴在鎭)의 집을 소각하였고, 같은 달 4일에도 의흥군(義興郡) 읍내에 들어가 경무분파소에서 총 수백 정을 노획하고 분파소 및 순검주택 3동을 소각시켰다. 같은 달 15일 그는 다시 흥해군 읍내로 들어가 순사들을 처단하였으며 군청과 기타 7동의 가옥을 소각시켰다. 같은 달 16일 경에도 청하군(淸河郡) 읍내에 들어가 순검 김학윤(金學潤)의 의복과 관급품 등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6월 4일 영덕군(盈德郡) 외남면(外南面) 장사리(長砂里)에서 군자금과 의류 등을 거두는 등 의병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 10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동지 김수곡(金水谷) · 김일원(金日元) 등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523·5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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