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기(李世紀) 선생은 <山南倡義誌 卷下 P36>, <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90>에 그 이름이 명시되어 있고, 유사에는 일명 이석(李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러 의사들의 기록에 나오는 이석이(李錫伊) 휘하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살펴보면 세 분은 동일인 듯한데, 각각의 이름으로 서훈을 받았다. 그리고 공훈록에는 세분의 생몰연대가 서로 다르니 기록의 오류인가, 각기 다른 분인가?이석(李錫) 생존기간: 1881.2.15.~1909.2.14. / 출생지: 경북 청송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독립장(1962) 공적내용 :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896년 을미사변으로 인해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거의(擧義)했다는 소식을 듣고 15세의 어린 나이로 총을 메고 의병에 참가했으나 의진이 해산되자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1905년 겨울에 정용기(鄭鏞基) · 이한구(李韓久) 등이 경주의 동대산(東大山)에서 거의(擧義)한다는 사실을 알고 동지를 이끌고 그 의병진에 가담하였는데 초장(哨長)의 직에 임명된 후 고군분투한 공이 인정되어 좌영장(左領將)으로 발탁되었다. 1907년에 남석문(南錫文) · 정순기(鄭純基) 등과 더불어 청송 영덕(盈德) 등지에서 의려(義旅)를 소모하다가 남석문은 체포당하여 처형되었으며 이석은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또한 정용기 의병대장이 입암(立岩)에서 전사하니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뒤를 이어 의병을 통솔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석은 중군(中軍)이 되어 분전하였다. 그러던 중 정환직 대장마저 청하(淸河)지방에서 체포당해 처형되니 의병진은 그 주장(主將)을 모두 잃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연소함을 들어 장위(將位)에 오르지 않고 주장(主將)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후에 장기(長䰇)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군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청하에서는 적 4명을 격살(擊殺)한 뒤 의병을 이끌고 울산(蔚山)을 향해 진군하던 중 복병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훗일의 재기(再起)를 기약하고 의병진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내려가 삼유산(三踰山)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고 있다가 1909년 2월에 적에게 체포되었다.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하여 도주하였으나 다시 체포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기려수필 141·143·14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79면 이석이(李錫伊) 생존기간:1879~1911.12.18. / 출생지: 경북 청송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독립장(1995) 공적내용: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처음에는 정용기(鄭鏞基) 의진에서, 나중에는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 주구배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석이는 이같은 시기에 정용기 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을사늑약」이듬해인 1906년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할 것을 결심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은 경북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통유문과 격려문을 각계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고하면서 총 궐기를 촉구하였다. 또한 정용기 의병장은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진행 계획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하였다. 이 의진에서 활동하던 이석이는 1907년 정용기 의병장이 일경에 피살, 순국한 후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음력 11월 13일 17명의 부하 의병들과 함께 경북 청하군(淸河郡) 죽남면(竹南面)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12월 9일에는 2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청하군 청하읍을 습격하였다. 아울러 1908년 음력 2월 19일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일본군 밀정 이명갑(李明甲)을 처단케 하는 등 군자금 징수와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3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2권 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53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484·525·526·625면 · 매일신보(1913. 3. 16)이세기(李世紀) 생존기간:미상~1908. / 출생지:미상 / 운동계열:의병 / 훈격:애국장(1991) 공적내용: 1906년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거의(擧義)할 때 영양(英陽) · 봉화(奉化)지역의 의병 소모(召募)를 맡았으며 동년 3월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이 결성되자 좌포장에 임명되었고 1907년 4월 의진이 재기할 당시에는 후봉장(後鋒將)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정용기를 이어 정환직(鄭煥直) · 최세한(崔世翰)을 차례로 의병장에 추대하고 청하(淸河) · 죽장(竹長) · 청송(靑松)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부하 60여 명을 거느리고 장기주재소(長鬐 駐在所)를 습격하여 일경을 처단하고 물품을 노획한 뒤 일경 분파소 · 세무소 · 우편소 · 순사사택 등을 방화하고 잔군(殘軍)을 인솔하여 동대산(東大山)을 중심으로 혈전을 계속하다 1908년경 피체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51·352·390·578∼582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輯 398∼402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