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1일은 제10회 의병의 날 기념일이다. 충남 홍성에서 행자부 주최로 기념일 행사를 개최하는데 전야제가 5월 31일 있다하여 마침 일요일이라, 이규화 임란 영천성수복대첩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님의 제안을 받고 일행 넷이 뜻을 모아 다녀왔다. 잘 정비되어 있는 홍주성과 친환경농업의 메카인 홍동면 일대를 둘러보고 저녁행사를 관람했다. 영천은 대한민국 의병도시협의회 33시군협의회에 이름이 없다. 영천은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수복전투와 구한말 산남의진을 통해 의병의 본보기가 되는 도시임에도 말이다. 경북은 경주시, 문경시, 영주시, 봉화군, 청송군, 울릉군의 이름이 행사장 메인무대 화면에 뜬다. 최태성 역사학자의 토크쇼 형식의 강의와 연극공연을 보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참석 인원은 적었지만 참석자 모두 진지하다. 의병의날 행사 지정의 과정과 의미에 대한 질문과 홍성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묻는 질문에 두 군민이 일어나 또박또박 대답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거언 14시간의 긴 하루 여행길을 다녀오면서 의병정신이 서려있는 의병도시로서의 우리 영천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이영성(李永成) 생존기간: (1873)~1909.10.13. / 출생지: 경북 흥해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2015) 공적내용: 1907~1908년 경북 경주 · 장기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순사주재소 공격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하면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정미의병항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영성은 정완성(鄭完成)과 함께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 하순경 정완성 등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경북 경주군 강서면(江西面) 두동(斗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8년 1월 3일에는 경북 장기군 읍내에 들어가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일본인 순사 모리(森某)를 총살하고, 일본인 순사 코사키(光崎某)의 양 다리 및 왼팔에 부상을 입혔으며, 총 3정과 칼 2자루를 획득하였다. 이때 정완성의 지휘로 순사주재소와 재무서, 우체소 순사의 집 3채를 불태웠다. 같은 날 이영성 등 의병들은 무기를 휴대하고 경주군 강동면(江東面) 양동(良洞)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군자금 100냥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30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 살인 및 방화죄로 교수형을 받고 공소했지만, 같은 해 8월 24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1909년 9월 20일 대심원에서 상고도 기각되어 같은 해 10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ㆍ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 : 1909. 6. 30) ㆍ判決文(大邱控訴院 : 1909. 8. 24) ㆍ判決文(大審院 : 1909. 9. 20) ㆍ刑事控訴事件簿 ㆍ大韓帝國官報(1909. 10. 16) 이주발(李周發) 생존기간: 1908;40세~1908.4.15. / 출생지 미상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1995) 공적내용: 의병으로 경북 흥해(興海)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4∼5년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 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이주발은 이 같은 시기에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8년 4월 13일 30여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북 흥해군 북안면(北安面) 수성동(守城洞) 등지에서 친일 동장 등에게 수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대구경찰서 정찰대의 기습 사격을 받아 7명의 동료 의병들이 피살되고, 그는 동지 조양동(趙良洞) · 차경수(車敬守) · 김수달(金守達) 등 3인과 더불어 피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달 15일 피체된 동지 이갑이(李甲伊)등과 더불어 소도(小刀)를 차입하여 포승을 절단한 후 탈주를 기도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제10집 270∼2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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