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 날의 사회에서 나와 내 것을 무상으로 내어놓고 뜻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선열들은 목숨을 바쳐 나라 위해 의병활동하고 독립운동 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야 남는 돈 좀 내어놓고 시간 쪼개어 일 좀 하는 건데 그걸 못하면 안 되지요.” 라고 독려하는 혜신스님의 말씀을 계기로 사업회의 부회장을 맡아 산남의진 선양사업을 평생의 의무로 삼았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기꺼이 3대 회장직을 맡아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려하는 혜신스님의 무주상(無住相) 보시행에 많은 이들이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다시 한 번 토로해본다.조공곡(曺功谷) 생존기간: 미상~1908.3.25 / 출생지: 경북 청송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2010) 공적내용: 경북 청송(靑松) 출신으로 1907년 음력 4월 하순부터 청송에서 남우팔(南又八), 이이동(李梨洞) 등과 함께 거의하여 포술장(砲術將)으로 활동하였고, 동년 음력 7월 2대 대장 정환직(鄭煥直)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흥해, 영덕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조직한 의병 진영으로 이한구(李韓久), 손영각(孫永珏) 등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정용기는 일본군 토벌대에 패한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을 돕기 위해 영해로 진군하던 중 1906년 4월 28일 경주 우각(牛角)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에 체포된 뒤 1906년 7월 하순경 해산하고 말았다. 1907년 4월 재기한 정용기는 영해, 청하, 청송, 포항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9월 초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는 수십 명의 장령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정환직은 스스로 산남의진의 2대 의병장이 되어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정비한 뒤, 흥해, 신녕, 의흥, 청송, 영덕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 분파소와 헌병 분견대, 그리고 우편국 등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2월 7일 영덕전투(盈德戰鬪) 후 일본군에게 포위되자 청하군 각전(角田)에서 부대를 해산하고 12월 11일 고천(高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순국하였다. 조공곡은 정용기가 재기(再起)한 1907년 4월 청송지역의 모병을 담당한 남석인(南錫仁)과 이세기(李世紀)를 따라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포술장(砲術將)으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정환직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조공곡은 1907년 10월 29일 포군초장(砲軍哨長)과 부장(副將)으로 흥해(興海)를 습격하여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 등 3명을 사살하였다. 또 12월 5일 영덕 서암전투에서 남석술(南錫述)이 전사한 뒤, 12월 7일 의병 83명으로 영덕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일본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에 정환직이 청하군 각전(角田)에서 부대를 해산하고 12월 11일 고천(高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순국한 후 조공곡은 청송으로 귀환하였다. 이후 조공곡은 1908년 3월 16일 체포되어 3월 26일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暴徒에 關한 編冊(대구경찰서:1908. 3. 26), 暴徒에 關한 編冊(대구경찰서:1908. 3. 27)조성길(趙性吉) 생존기간: 1860.10.1~1917.9.18 / 출생지: 경북 청송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족장(1990) 공적내용: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그의 고향 청송에서도 김상종(金象鍾)을 중심으로 청송의진이 구성되었다. 이에 조성길은 청송의진에 입진하여 청송·영덕(盈德)·흥해(興海)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고종의 해산조칙을 받들어 1896년 10월 의병을 해산하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영천(永川) 출신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조직되고 거도적(擧道的)으로 모병활동을 전개하자 정성길은 서종락(徐鍾洛) · 남석인(南錫仁) · 남석우(南錫佑) 등과 함께 동 의진에 입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상중(喪中)이었으므로 부득이 입진하지는 못하고, 다만 청조문(請助文)을 각지에 발송하여 의병을 소집하는 등, 간접적으로 의병활동에 협조하였다. 그 후 1907년 9월 입암(立岩)의 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고 11월 정용기에 이어 의병장이 된 정환직마저 적과 접전 중에 체포되어 순국하는 등의 불행을 겪는 동안 끝까지 의진과 함께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산남창의지 하권 17면 ·백운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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