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로 공훈록에 기록된 열사들 소개를 끝난다. 아래 탁영조 의사 조에 나오는 것처럼 함께 활동했던 김윤황, 천생이 같은 분은 그 분의 이름으로 따로 기록된 바 없으니 탁영조 선생의 공훈록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산남의진사(창의지)나 산남의진유사를 편집할 당시의 상황을 회상해보면 편집자들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 외 다수의 뚜렷한 활약상을 보이지 못하고 종군한 민초들, 본대 외 유격부대 장수들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병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 중 이렇게 적군의 재판기록을 보고 서훈을 드린 45분은 공훈록에 기록이라도 남았지만 얼마나 많은 무명(無名)의사들이 묻혀버렸을지 알 수 없으니 다만 안타까울 따름이다.최한룡(崔翰龍) 생존기간: 1849.3.12~1917.10.26 / 출생지: 경북 청도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건국포장(2007) 공적내용: 경북 청도 출신으로 1907년 4월부터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격문을 발표하였고, 1907년 7월에는 부하 70명을 거느린 의병장으로 청도 · 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국권회복을 모색하던 중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전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신광면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에 체포당한 뒤 자수하였으나 일본군의 악형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최한룡은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다섯 차례의 격문(檄文)을 발표하였다. 즉 <天下에 告示하는 文>(1907. 4), <國債償還件>(1907. 5), <斷髮令件>(1907. 7), <埃及近代史를 읽고 大韓國의 危急함을 歎함>(1908. 1), <國體로서 賊國을 討伐할 件>(1908. 1) 등을 통해서 국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1907년 7월경 부하 70여 명으로 창의, 의병장으로 청도 · 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1909년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해인사(海印寺)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최한룡은 합천 해인사와 경남 밀양(密陽)에 거주하는 사위 박재하(朴在夏)의 집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요양을 하다가 1917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韓國獨立運動史資料16 義兵篇ⅸ(國史編纂委員會) 441~443면 ·한말의병전쟁자료집(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민족문화연구소) 257~288면 ·金賢鎭·崔翰龍의 陳述書 抄本 報告 件(警秘發 제804호, 1908. 6. 11) 統監府文書(國史編纂委員會) 제2권 162~188면 탁영조(卓永祚) 생존기간: (1879)~1909.02.01. / 출생지: 경북 신녕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2013) 공적내용: 경북 신녕(新寧) 출신으로 1904년 6월경 경북 자인(慈仁)에서 김윤황(金允璜)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07년 9월부터 10월까지 경주(慶州), 자인 등지에서 마중군(馬中軍)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탁영조는 1904년 6월 경 김윤황, 천생이(千生伊) 등과 함께 자인군 읍내 김향무(金卿武)로부터 군자금을 600원을 모집하였고, 1905년 10월 자인군에서 군수에게 450원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김윤황은 경북 상주(尙州) 출신으로 1903년 9월부터 1908년까지 청도, 자인, 경주, 신녕, 경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일본군 제14연대가 의병 토벌에 투입되었고, 자인지역에는 대구에 본부를 둔 제14연대의 자인분견대가 주둔하였다. 당시 자인지역에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속한 소규모의 의병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1907년 음력 9월 탁영조는 마중군 등과 같이 무기를 휴대하고 경주군 후초동(後草洞) 이진사(李進士)로부터 군자금 300원을 모집하였고, 동년 음력 10월 무기를 휴대하고 자인군 섬림(蟾林)의 이장으로부터 군자금 250원을 모집하였다. 그 외 동년 9월 경주군 서면 아화시장(阿火市場)에서 우편물을 빼앗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8년 12월 18일 소위 살인강도죄(殺人强盜罪)로 경성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1909년 2월 1일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京城控訴院:1908. 12. 18)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456~459면 ·刑事控訴事件簿 ·朝鮮王朝實錄 純宗 2年(1909. 1. 25) ·官報(1909.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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