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紀4279, 西紀1946(丙戌)에 山南倡義誌 編輯에 着手하여 2卷 冊子로 壹百帙을 發行하다. 第1卷은 倡義한 그때의 시국현황과 전투한 경과를 略說하였고, 第2卷은 활약한 將兵의 명단과 약력을 간단하게 기록하였다.』<산남의진유사> 655페이지이다. 순서를 바꾸어 그동안 <산남창의지>2권과 유사, 공훈록에 기록된 장병들의 이야기를 열전으로 소개하였거니와 이제 <산남창의지>1권의 산남의진 역사를 소개해보려 한다. 이미 번역되어진 글을 약간 고쳐 옮기는 것이라 새로울 바는 없으나 묻어져가는 역사를 소개하는데 의의를 둔다. 많은 분들이 구한말 영남지방에서 일어난 항일의병 역사를 다시 읽고 기억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하면서...산남의진사(山南義陣史) 이순구(李純久) 엮음 권두사 조선은 현재 인구 3천만이요, 역사 반만 년이다. 동·서·남 삼면은 천험의 바다로 둘러있고, 북쪽은 대륙과 연접하여 민족이 흥왕할 때는 만주에 이주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문화의 발전이 대륙과 서로 교류함이 많았다. 풍속은 순후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세계 각국이 금옥강산(金玉江山)이라 찬양한다. 유사 이래 강토를 지키는 데 있어 국제적으로 모욕을 당하였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위인달사(偉人達士)의 백절불굴한 분투와 노력으로 독립을 유지하여 왔음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는 바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방의 마주보는 해안에 간악무도하기로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해적으로 이루어진 소위 일본국이라는 왜놈들과 인접하며 건국 이래 무릇 40여 회의 궁흉극악(窮凶極惡)한 침략을 당하였으며, 그중에도 4백여 년 전에는 치가 떨려 몸서리쳐지는 저 임진왜란을 당하자 온 나라가 갖은 힘을 다하고 무한한 고통을 견디면서 줄기찬 격전과 이웃 나라의 원조도 얻어 왜적을 격퇴하였다. 왜적들의 죄상을 생각하면 마지막 한 놈까지라도 모두 무찔러 없애버려야 마땅하였으나, 하늘은 다 죽이는 이치가 없다는 섭리에 순응하여 항복을 받고 칼과 총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우리나라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국가의 쇠약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 국가의 재정도 바닥이 나서 왜적이 불태워 잿더미가 된 궁궐도 복구하치 못한 채 그대로 방치하여 오다가, 섭정대원군 때에 와서야 겨우 경복궁을 중수하였고 충분한 국군은 양성하지 못한 것도 경비의 궁핍 탓이다. 임진왜란에 당한 고통의 정도는 지금에 와서도 알 수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항간에 떠돌고 있는 상말에 부족한 사람을 ‘풍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풍자(諷刺)한 것이요, 흥분(興奮)의 가곡(歌曲)에 ‘쾨장쳥이’를 부름은 왜장 청정(倭將 淸正)의 난을 길이 잊지 말자는 뜻인 것이다.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괴로움이 지나가면 즐거움이 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치이다. 임진의 패전을 당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왜적들은 악한 마음과 살기 띈 훈련과 연구에 신출귀몰하는 갖가지 계략을 다하며 백성을 이끌어 ‘조선을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탄(倂呑)하여야 된다. 임진의 쓰라린 원한을 갚아야 된다.’는 굳은 맹서로써 국책을 세워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을 하나의 국책과 국시로 정하고, 또 정략으로서 조선에서 죄를 얻고 망명한 악질분자들을 수용하여 이것을 주구(走狗)로 삼고 국권을 약탈하려는 매국 도배들과 손을 잡아 이것들을 앞잡이로 세워 다시 조선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이에 금수강산은 왜놈들의 시장 물건이 되고 말았다. 통곡할 일이며 망극하기 짝이 없고, 전에도 옛날에도 없었던 악경(惡景)이다.때는 광무(光武) 융희(隆熙) 연간! 매일같이 어마어마한 살풍경이 벌어졌다. 왜놈들은 황후를 시해하여 불태우고 황제를 멋대로 폐립(廢立)하여 국권을 송두리 채 손아귀에 넣게 되니 천지는 암흑과 절망으로 기울어져 그야말로 칠흑 밤중이 되었다. 그 누가 민충정공의 계정혈죽(桂亭血竹) 閔泳煥(1861년, 철종12∼1905년, 광무9).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忠正,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살하였다. 뒤에 忠正公의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받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血竹은 충정공이 자결을 한 자리에서 피어난 대나무의 잎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제가 베어내려 했으나 부인이 따로 보존하여 오다 종손인 민병기씨가 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유품들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을 알아보며, 대마도(對馬島) 외로운 섬에 계신 최면암 면암 최익현(1833년, 순조33~1907년 ) 조선후기 장령, 돈녕부도정,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항일운동가. 단발령에 항거 등 항일척사운동의 앞장섰고,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저서는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영령을 모셔오리오. 해아(海牙) 담판에 국서를 봉정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장선혈(一腸鮮血)로써 만국에 애끓는 성명을 한 사절단 일행을 후원할 사람은 그 누구이며 헤이그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하고자 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을 정사, 전 한성재판소 검사 이준(李儁)을 부사,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사 이위종(李瑋鍾)을 참사관으로 임명하고 이준에게 밀지를 주어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권총 1발로써 천하의 대적을 베이고자 결심하고 우라지오 지방으로 출발한 안(安) 참모중장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우라지오(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안중근 의사를 말함을 뒤따른 사람 없으니 이천만은 어육지경(魚肉之境) 짓밟고 으깨어 아주 결딴난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요, 삼천리는 눈물바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