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고도 비분한 눈물을 참다못하여 국내 몇 곳에서 왜적에 항거하자는 의병의 격서(檄書)가 비로소 침묵만을 지키고 있던 천하의 적막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원주 민특무(閔特務)의 진(陣) 원주 민특무의 진: 구한말의 군인이자 의병장인 민긍호(1865년~1908년 2월 29일)가 특무정교(特務正校:현 한국군의 부사관 원사(元士))로 근무,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원주진위대 병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추서과 호중(湖中) 지방의 허왕산(許旺山)의 통문 호중(湖中) 지방의 허왕산(許旺山)의 통문: 허위(許蔿:1854~1908) 왕산(旺山)은 호(號)이며, 구미 출생.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충청일대에서 활약, 항일운동의 결속을 위해 전국 의병진에 통문(通文)을 보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추서, 그리고 관동 지방의 이강년(李康䄵)의 깃발 관동 지방의 이강년(李康䄵)의 깃발: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북, 강원, 충북지역에서 활약한 이강년(1859~1908). 호는 운강(雲岡). 문경 출생.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추서이 한성(漢城) 한 모퉁이의 노령고신(老齡孤臣)의 통곡과 때를 같이하여 메아리쳤다. 통곡하는 사람은 그 누구이며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는 전 도찰사(都察使) 정동엄(鄭東庵) 공이며 황제의 밀지를 받고 장남(長男) 단오공(丹吾公)과 의병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단오공은 부공(父公)을 배별하고 경성을 떠나 영남에 도착하여 평소의 심복인 이지포(李芝圃)·정검와(鄭檢窩) 이지포(李芝圃): 산남의진 1차 진영 중군장 이한구의 호, 정검와(鄭檢窩): 산남의진 1차 진영 소모장 정순기의 호 등 여러 요인(要人)과 함께 남선(南鮮)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니, 마치 암흑의 천지에 솟은 새벽 별이 먹구름을 뚫고 서광을 비치는 것 같았다. 각지의 의사들은 새벽 종소리를 듣고 찾아오니 비록 그 수는 적다할지라도 의기는 충천하였다.이에 부서(部署)를 나누어 편성하고 진(陣)의 이름을 ‘산남진(山南陣)’이라 하였다. 기세를 올리고 경성을 향하여 출발하니 그 성세가 크게 떨쳤다. 전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서로 기치를 날리고 호응하니 청천에 백일이 다시 솟아오르고 벽력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하였다. 이 때 왜적들은 4백년간 연마한 병대와 준비한 무기로 조선 천지를 덮고 조선의 현직(現職) 관리들을 이용하여 악선전(惡宣傳)을 다하며 의병들과 싸움이 벌어졌다.참혹하고 비통한 일이다. 각지의 의병들은 곳곳에서 참패를 당하고 있으나 동족들은 의병을 후원하지 못하고 충심에서 솟아오르는 억울한 심정을 눈물로써만 수수방관(袖手傍觀)할 도리 밖에 없으니 국운이 극비(極否)함을 족히 점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산남진의 대장 이하 각 부문의 모든 장령이 거의 순절하고 1907년 9월1일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40여명의 장병이 전사한 입암전투를 말함 경성에서 고대하다 못한 도찰사(都察使) 백발 노장이 내려와 다시 대중을 통솔하니 그 의기는 장하지만 형세는 처참하였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길을 밟으며 천신만고의 힘을 다하여 동격서공(東擊西攻)하여 오다가 마침내 천운이 다함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운(時運)이었다.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중도에 해를 당하니 천추에 남긴 것은 한(恨)뿐이었다. 모든 의병들은 뒤를 계속하여 각지에서 전전(轉戰)하였으나 모두 여지없는 몰패(沒敗)를 당하고 말았다. 다만 후인의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역사는 패전된 곳에서 거행한 충혼을 추도하는 슬픈 정성에서 흰옷을 바꿔 입는 대례와 선장(先將)의 유언으로써 두령을 찾아뵙는 군기(軍紀)와 그 대장의 영전에 맹서를 올린 결사대와 적탄 속에서 최후를 부탁하는 영결과 소년의 의로운 뜻, 상인의 애국심 등등 거룩한 사적도 있다.이밖에도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진(晋)나라 예양(豫讓)의 아내를 꾸짖은 것과 같은 절부(節婦)와 섭정(攝政)의 자씨(姉氏)를 때린 여걸사와 망부(亡夫)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열렬한 여의사(女義士)같은 충신·절사·효자·열녀들의 열렬한 애화도 이 구전에 있다. 이러한 열사·열녀들의 정성으로써도 큰 성공을 못함은 하늘의 주어진 운명이라 할 것이다. 의병은 이로써 포부로 전하고 삼천리 강산에는 먹구름이 다시 덮어 폭풍과 폭우에 시달림이 30여 년 갖은 고통을 겪었다.천운은 다시 순환하여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조선은 독립국가 건설을 하게 되니 독립 운동자들을 추억하며 의병의 초기의 출발로부터 금일 국가 건설의 도정에 이르기까지 산남의 의진 실사를 대략 초(抄)하여 모아 애국 제현 앞에 청구고전장(靑邱古戰場)의 피어린 봉화(烽火)를 봉정하고 편집상의 범도에 대하여는 고명 군자의 병필(秉筆)을 공대(恭待)할 뿐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