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에 올라보면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와 나란히 조선전기의 문신인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소가 있다. 연일정씨의 묘원에 성이 다른 이씨의 묘소가 들어서게 된 사연이 있어 소개를 한다. 이석형 선생은 연안이씨이지만 바로 옆 능선에 잠 들어있는 정몽주선생의 증손녀 사위가 된다. 이곳은 원래 바로 옆 능선에 안장되어 있는 정몽주 선생을 모시고자 한 자리였으나 증손녀인 이석형 선생 부인의 계략으로 자기 남편이 안장되었다고 한다. 사연인 즉, 정몽주의 후손들은 이 능선에 포은선생을 뫼시기로 결정하고 장사 하루전날 광중을 파 놓았다. 포은의 증손녀는 이곳이 천하명당이란 말을 듣고 친정보다는 시댁의 가문을 일으키고자 아무도 몰래 밤중에 광중에 물을 길어다 부어놓았다. 다음날 포은선생을 모시고자 현장에 올라보니 광중에 물이 가득 차 있었고 후손들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어 바로 옆 능선에 모셨다고 한다. 훗날 이석형이 죽자 부인은 친정에 가 지난번 물이 솟았던 그 자리에 남편의 묘소를 쓰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곳에다 이석형 선생을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리나라는 신라 흥덕왕 때 월성 손씨 시조 손순의 묘소를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 명당에 물붓기라 하여 전국적으로 흔히 벌어진 일들이다. 그런데 이 묘소가 명당길지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안이씨 집안에서는 그 후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연안이씨 대종회 자료에 의하면 부원군 3, 정승 8, 대제학 6, 판서 42, 공신 4, 청백리 2, 문과급제자 120명 등 묘소 하나의 후손 중에 이토록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는 드문 일이다. 반면 포은 정몽주의 후손들은 현종 때 우의정에 오른 9대손 정유성과 판서 2명이 있었을 뿐 이석형의 후손에 비해 발복이 아주 빈약한 편이다. 이 장소는 우리나라의 풍수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다녀 왔을만한 곳이고 두 묘소가 위치한 용맥이 양쪽으로 나란히 뻗어 내려와 전형적인 쌍유혈이다. 그런데 보는 이에 따라 이곳이 명혈지다, 저곳이 더 명혈지다 하면서 각자 해석을 달리 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인의 식견으로 보아 이곳의 풍수입지는 먼저 혈장뒤편의 현무봉은 금체로써 대체로 양호한 편이나 포은선생 묘소의 용맥은 지현굴곡이 거의 없는 사룡(死龍)에 가깝다. 반면 이석형선생의 묘소 뒤편을 올라보면 현무봉에서 혈장까지 굴곡이 있어 살아있는 생룡(生龍)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국토지리원에서 발행한 축적 지도의 등고선을 보아도 우측 이석형의 묘소가 있는 용맥의 기운이 훨신 더 강하다. 또 하나 살펴볼 것은 포은 선생의 묘소가 있는 용맥이 이석형선생 묘소의 위치보다 고도가 좀 더 높아 이석형묘소의 내백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동시에 그 용맥의 양측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은 우선으로 이석형 묘소의 용맥을 감싸고 흐르기 때문에 이곳에 많은 생기를 응축시켜준다. 따라서 이석형선생의 묘소가 더 생기 가득한 진혈지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