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경북남보훈지청의 협조 요청으로 포항 세명여고 학생과 충효재에서 인터뷰를 했다. 비록 신문사의 취재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고등학생이 산남의진과 충효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니 참으로 기특하다. 동행한 보훈청 직원과 포항시 죽장면 서포중학교 옆에 세워진「산남의진발상기념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은 입암전투가 일어났던 근처에 기념비가 세워진 사적일뿐이고 발상지는 엄연히 충효재이다. 보훈청에서는 입장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발상지’ 라는 말에 뭐 그리 큰 무게를 담느냐 할지모르겠으나,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산남의진의 출발이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인줄로 오해할 소지가 크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산남의진발상기념비’를 클릭하자 ‘뉴시스’, ‘프레시안’,‘경북신문’, ‘프라임 경북뉴스’ 의 기사가 똑같이 『 ~산남의진 전투지는 구한말 산남의진 김용기(1대)김환직(2대) 최세윤(3대) 의병대장을 비롯한 포항·영천지역 의병들이 죽장면 입암리 일원에서 치열한항일 의병 전투를 벌였던 곳을 말한다. ‘산남의진 전투지’ 인근 입암서원 하천변 일대는 1907년 8월 산남의진 의병들과 일본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여져 김용기 의병대장과 이한구·손영각 등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했다. 이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건립위원회(위원장 조성문, 총무 이석범)와 권태한 죽장중고등학교장 등 지역민들이 지난 1985년 입암리 하천 변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를 세웠다. ~ 』로 올라와 있다. 기사를 제보한 이나 신문 기자는 정녕 산남의진에 대한 정보가 이리도 부족한가. 어찌 대장의 성(姓)을정씨에서 김씨로 바꿀 수 있는가. 자칫 왜곡된 채로 세월이 흘러 굳어질까 두렵다. 지방자치단체의 폐해다. 또 글을 각 진에 보내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을사 10월 19일에 5적이 나라를판일은 어느 누가 통곡하고 자절(自絶)하려 아니하리오. 우리 한국 백성들은 자유의 방침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탄압의 힘을 두려워하면서 늘상 분통을 머금고 아픔을 참으면서 오직 조정의 마땅한 계획만을 기다린지 벌써 일곱 달이 지났으나 어떻게 한다는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비록 미욱하고 어리석어서 사리를 판별치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일지라도 차마ㅜ 불공대천의 원수와 한 땅에 있을 수없고,자주의 기초를 만들고자 하거늘 안동진위대가 영해의 의진(義陣) 영해의 의진(義陣)1)을 격파하였다 하니 5백년 문명의 나라를 영영 섬 오랑캐의 노예로 만들려 함인가? 각하는 세대(世代)로 이어 온 공경(公卿)의 후예로서 천은(天恩)을 입음이 깊거늘 어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리오. 우리는 떳떳한 마음을 간직하여 이 민족의 멸망의 길을 막고 국세가 장차 기울어지는 것을 만회코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금일 망녕되이 의병을 일으켰으니 불가불 귀대(貴隊)에 알리는 바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조금이라도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비록 몸이 희생되더라도 진실로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서와 대오를 정하여 행군하다(定部伍行軍)<산남창의지 17p) 이때에 각지에서 의진에 따르기를 갈망하는 자가 많았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두 모이지 못하고 중요한 인사들은 각지에서 출몰하며 의병을 모았는데, 그 노고는 이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에 정용기 여러 사람과 더불어 상의하여, “대세의위급함이 일각에 박두하였으니 모든 일을 속히 행함이 옳다.” 하고 드디어 부서를 정하는데 여러 사람의 추천과 희망에 의하여 정용기가 대장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은 그 재능에 따라 각각 일부의 책임을 맡아 각지를 순회하여 백성을 안도시키며, 한편으로 군사를 모집하고 또 한편으로는 군사를 훈련하였다. 정용기 홀로 경주로 가다(鄭鏞基 慶州로 獨行) 신태호(申泰浩)의 패전 소식이 전하여 왔다. 용기 말하기를, “순경(舜卿)2)의 나쁜 일이 나의 나쁜 일이다. 좌시(坐視)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영해(寧海)로 출발하여 경주 우각(愚覺)에 이르니 수림이 울창한 곳에서 한 떼의 병정이 나타났다. 탐지시켜 한 장의글을 얻었는데 쓰여있기를 ‘귀서(貴書)를 받아 보고 그 의기의 충천함을 감탄하였다. 비록 그러나 근자에 위로부터 명령이 있기를, “일본은 우의를 존중히 여겨 조선의 내란을 평정하려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고 군대를 출동시킴은 헤아릴 수 없이 감사한 일이거늘 이를 생각지 않고 국내 각지에 민심의 동요가 날로 심하니 이제부터는 그 선동한 자를 낱낱이 포살하라.”하고, 또 일설에는 서울에서 어떠한 대관(大官)이 잡혔다 하니 혹은 존공(尊公)의 아버지가 아닌가 추측한다. 나의 이 말은 다만 초(楚)를 위하고 조(趙)를 위함은 아니니3) 깊이 생각함이 어떤가?’하는 것이었다. 이한구(李韓久)를 돌아보며 “천리행군 중에 아버지의 일이 걱정되니 나는 부득이 경주로 가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한구가 동행하기를 원하였다. 용기는 “그대가 없으면 대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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