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의 심부자는 15세기 초 심원부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전한다.현재 송소고택을 지키고 있는 종손 심재오씨에 따르면 원래 청송 덕천리에 터를 잡았으나 부를 이룬 심처대가 분가하면서 호박골(지금의 파천면 지경리)로 옮겼고 그의 7대손인 심호택이 다시 덕천리로 옮겨 송소고택을 건립했다.그들은 호박골에서 많은 재산이 불어나자 집은 협소해지고 해마다 늘어나는 과객들을 유치하기에 불편하여 1880년경 원래의 세거지인 덕천리에 99칸의 저택을 지었다. 이 고택은 1985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50호로 지정되었다.대문은 솟을 대문에 홍살문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주인이 거처하는 곳이다. 우측에는 작은 사랑체가 있고 그 뒤로 안채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독립된 마당과 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 계층의 주택모양으로 99칸이다. 그 당시 부자들은 주로 99칸의 집을 지었으며 민가로는 최대의 규모이다. 나라의 법도가 사갓집은 99칸을 넘지 못하였고, 조선의 궁궐은 999칸을 넘지 못하였으며, 중국 천자의 궁궐은 9999칸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그리고 세종 때 제정된 「각간지수」(집의 칸수를 제는 방법)에 의하면 벼슬아치들의 지나친 허욕을 막기 위해 왕의 친지와 친형제는 50칸, 대군은 60칸, 2품 이상의 관원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일반백성은 10칸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청송심씨는 심홍부를 시조로 하는바 그의 증손인 심덕부와 심원부 때 가계의 흐름이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형인 덕부의 후손은 왕후 3명과 부마 4명을 포함 13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특히 그의 아들 심온과 손자 심회까지는 3대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반면 동생 원부의 후손은 벼슬에 나가지 않는 대신 부(富)를 이루어 냈는데 그의 11대손 심처대 때 부를 이루어 9대 250여 년 동안이나 만석의 부를 이어갔다.이들이 만석의 부를 이룬 것과 관련해 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심처대는 젊은 시절 개울가에 쓰러져있는 한 노스님을 만나 음식을 주고 구휼 해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부모님의 묏자리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풍수가 유행하였고 특히 우리나라의 부호들은 풍수를 거의 생활화하던 시대였다. 현재 송소고택의 풍수입지를 살펴보아도 양택지의 기본조건인 배산임수와 전저후고형을 갖추었고 특히 고택을 감싸고 흐르는 집 앞의 신흥천은 그들이 부를 이루고 유지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수관재물(水管財物)”이라 하여 풍수에서는 물을 재물과 연관지어 해석하고 있고 물이 혈장을 환포해주면서 천천히 흐르면 그 안쪽을 대길지로 해석한다.이러한 길지에 지어진 고택 이였기에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보전되고 현재는 연간 수만 명이 다녀가는 관광명소가 되어 전 국민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