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은 내 앞에서 옷을 벗었고 옷을 입었다. 그 스스럼없음이 이불속에 있는 내게 아늑함으로 다가왔다. 그만큼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거리감이 한사람에 대한 분명한 신뢰로 자리매김 되었다. 편해진 따뜻한 시선 안에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 안에, 나도 그렇게 보이길 소망하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행복한 전류가 찌쟁찌쟁 감지되었다.
“아버지가 사주신 섬까지 데려다줄 선주를 알아보고 있어요. 무인도지만 제가 땅굴을 뚫어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며두었어요. 태양광으로 전기도 들어오게 하고 빗물을 모아 식수도 가능하게 만들어뒀어요. 몇 달치 생필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저장되어 있어요.” “섬이 아니라 피난처를 만들어 두었군요. 살면서 불현 듯 가고 싶어 하는 자기만의 무릉도원 같은 곳, 맞습니까? 갑자기 은영씨가 신기하고 독특하게 보입니다. 하하.” “그곳은 제가 처음이고 법이고 해답입니다. 그래서 범고래를 포획해도 불법이 아니에요. 이제야 조금씩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이해되시죠?” “그러면 포경선도 섬에 정박해 있는 건가요?” “뱃머리에 포경포를 단 큰 배는 없어도, 열악한 재정 상태를 감안하여 뗏목에 어느 정도 장비를 갖춰놓았어요.” “뗏목으로 범고래를 잡은 적은 있습니까?” “낫싱! 선생님이 섬에 들어가신 그때부터 초침과 분침과 시침이 시작됩니다. 아담과 이브처럼.” 나는 변화무쌍한 바다에서 뗏목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은영은 새로운 영토의 달달한 시작을 꿈꾸고 있었다. 범고래가 분명 고등어나 참치보다는 커다는 생각과 그에 버금가는 뗏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 거렸다. 은영의 손길이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져주었을 때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은영의 혀가 그늘지고 구석진 곳만 머물고 갔을 때 비로소 노예처럼 복종의 자세로 갖춰졌다. 은영의 지휘와 조율은,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졌을 때 이제는 달아날 수 없는 튼튼한 족쇄가 채워진 줄 알게 해주었다. 그녀는 내게 시간이었고 방향이었고 최선이었고 목숨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니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미 백기를 들고 투항해버린 자신이 우스워질 것 같았다. 낚싯배 선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행히 절정으로 치달을 때 전화벨이 울리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렸다. 느슨해진 시간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눈으로만 확인하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금액 흥정을 순조롭게 끝낸 은영은 섬 이름을 짓자는 제안을 했다. 하긴 이름이 필요할 것도 같았다. 애완견을 사와서 가족회의를 했지만 적당한 이름을 짓지 못해 ‘개야’라고 불렀다는 이웃집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 죽은 ‘개야’를 묻어주고 돌아설 때 가장 후회가 되었다고 했다. 이름하나만으로 소홀히 대접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추억 속에 잠기기에는 진지하지 못해서 ‘개야’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고 했다. 정말 은영과 머리를 맞대었다. 이마와 이마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행복했다. 곧 섬 이름을 하나씩 후보로 종이에 옮겨 적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