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 후반 청송의 심부자댁은 ‘富不三代’란 우리나라 속담을 비웃기라도 하듯 9대 250여 년 동안이나 만석의 부를 누렸고 마지막 일제강점기에는 2만석에 가까운 수확으로 재산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전해진다.조선시대에는 전국 어디를 가나 그 지방에서 큰 부자를 천석꾼 혹은 만석꾼이라 불렀다. 이것은 1년간 농사를 지어 천석 혹은 만석을 거둘만한 논밭을 가진 부자를 빗댄 말이며 꼭 천석 혹은 만석이 아니라도 그만큼 큰 부자라는 뜻이다.이러한 부는 사실 얻기도 힘들지만 자손 대대로 지켜나가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부불삼대’ 즉, 3대부자 없고 3대거지 없다란 말이 생겨났고 또한 어렵게 얻은 부를 이웃에 베풀고 사회에 환원 할 줄 아는 아름다운 부자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기에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다.만석의 재산을 현재의 금액으로 따져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계산이 나온다. 곡식을 세는 단위인 석(石)은 우리말로는 ‘섬’이다. 그러니 석과 섬은 같은 말이고 이것은 곡식, 가루, 액체 따위의 부피를 잴 때 사용하는 단위다.여기서 한 섬이란 ‘열 말’, 즉 가마로 치면 두 가마니에 해당하고 만석이라면 쌀 2만 가마니에 해당한다. 무게로 보아 1가마니는 80kg이므로 현재 쌀 20kg이 약 5만원으로 볼 때 쌀 2가마니는 40만 원선이다.1년에 만석이면 년 수입 40억의 수입이 된다. 현재로 보아도 일반 직장인의 약 200배에 달하는 수입이지만 배불리 먹을 것조차 없었던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비교해보면 만석꾼은 굉장히 큰 부자였다. 소작농민들의 숫자만 보아도 몇 개 면 단위의 인구가 그 집 농사로 먹고 살았으니 요즈음으로 보아 대기업의 총수에 버금가는 부자임이 틀림없다.1년 소출이 만석에서 이만석이나 되다보니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수가 없다고 하였고 전국 어디를 가나 심부자의 땅이 없는 곳이 없어 조선 판 해가지지 않는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다.개화기 때 화폐가치의 변동이 심해지자 나라에서 세금을 은화로 납부하라는 지시에 따라 심 부자가 의성 안계에 있는 전답을 팔아 화폐로 바꾸자니 안계 고을의 돈이란 돈은 전부 모였다고 했고 또 이를 청송으로 옮기는데 그 행렬이 10리(4km)나 뻗쳤다고 한다.여기다가 조선시대 내내 정승 13명, 왕비 3명, 부마를 4명이나 배출했으니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쥔 최고의 명문가 집안 이였다.이들은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영남지역의 양대 거부로 존재했고 그 많던 재산들은 구한 말 독립운동을 위한 의병들의 자금줄이 되면서 부의 마침표를 찍었다.현재의 송소고택을 지은 심호택은 대구에 있는 국체보상운동본부의 청송지부장을 맡아 많은 자금을 공급하였고 오직 구국일념 하나로 끝까지 애국정신을 발휘하였기에 그들이 오랫동안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만큼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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