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는 시간은 어느 틈에 찾아오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느림보처럼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낮잠 자둔 에너지를 괜히 은영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으로 초조함을 감추려고 했다. ‘누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나.’
“큰일 앞두신 분이, 힘을 비축해두세요. 그러다가 자칫 저놈들에게 당하는 수가 있어요. 서로를 챙겨주는 마음씀씀이가 예사롭지 않든데요.”
“우리만큼은 안되겠죠. 하하. 사실 은영씨 믿고 이 작전에 순순히 뛰어든 겁니다.”
은영이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밤 디데이라는 것을 모르게 평범한 하루처럼 소등을 하고 기다려야 될 것 같네요. 제가 보기에는 보통 영악한 놈들이 아닌 것 같아요.”
불을 끄고 창밖을 통해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수풀더미는 움직임이 없었다. 곡괭이 날에 찍힌 발등을 서로 핥아주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은영이도 내 어깨에 기대어 얕은 잠에 빠져있었다.
헤드랜턴을 쓰고 있는 내가 잠시 웃기게 생각되어졌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끝과 끝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섬에서 인간과 밀접한 삶을 거부하는 생활방식에는 당연히 뻔뻔함도 한몫을 해야 한다는 지론은 성립하였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탐 행크스는 배구공에게 윌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외로움을 달랬지 않는가. 영화를 보며 내내 당연하다고 인식되는 것은 체면과 염치가 필요 없는 ‘나홀로’ 생활반경이 주는 자유로움이 아닐까.
어깨에 기대어 은영의 간헐적인 코골이를 들으며 피식 미소가 그려졌다. 내 인생도 참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육해공을 넘나들며 기막히게 전개되는구나.
약간 벌어진 은영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추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떴지만 이내 눈을 감고 입안으로 들어온 내 혀를, 자신의 혀로 마중 나와 주었다. 힘을 비축해두라는 다짐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은영이가 허락하는 구석구석을 만지고 쓰다듬고 주물럭거렸다. 시간은 한시에 임박해있었다. 다시 창밖을 살폈다.
달빛에 교교히 흐르는 새벽은 숨을 멎게 하였다. 저 바다가 그랬고, 저 파도가 그랬고, 저 백사장이 그랬다. 그렇지만 숨통을 끊어놓아야만 살 수 있는 대치점이 한가하게 풍경에 매료될 수만은 없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잡고 헤드랜턴의 전등을 점검했다. 왁살스럽게 곡괭이 자루에 힘을 실었다. 살기위해서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욱 강해진 그들과 맞서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은영이도 내 뒤를 따를 채비가 끝나있었다. 처음에는 혼자 작전에 임한다는 각오가 있었지만 설득력 있는 은영의 말에 공감하였다.
“싸움에는 선방도 중요하지만 숫자로 위협을 가해 기선 제압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사람 하나로 읽어주지. 저놈들의 눈에 제가 여자 하나로 보이진 않을 거예요. 저도 망치를 들고 선생님을 따를 겁니다. 제 남자는 제가 지켜야지요.”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심장이 뛰면서 떨리고 무서웠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져 있었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헤드랜턴에 전등 스위치를 올리려다가 달빛에 의지하기로 했다.
뒤꿈치를 들었다. 걸음걸이가 어색하고 발끝에 쥐가 나는 것 같아 그냥 소리죽여 수풀더미로 걸음을 옮겼다. 은영의 발소리도 조곤조곤 따라오고 있었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