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의 물결이 쏜살같이 달려와 방파제를 후려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파도가 부서지고 흩어졌다. 그 무수한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바위는 반질반질하면서도 뭉툭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물무늬가 선명한 바위의 위엄이, 경견한 하나의 마음으로 모아졌다.
굴곡진 삶을 투정했던 한 때를 반성하면서 바닷가를 거닐었다. 덧없는 세월 속을 아직 현재진행형으로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울컥했다.
어쩌면 대자연이 던지는 의미는 곱씹을수록 늘 새롭고 놀라웠다. 옅게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 자리에 멈췄다. 최대한 빠르게 돌아섰다. 살기(殺氣)를 동반한 비린내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노랑도사견이 공격사정권 안으로 포착하기 위해 낮은 걸음으로 따라온 것이다. 파도에 흠뻑 취해 경계를 소홀히 한 나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형지물도 없는 백사장에서 마주친다는 것은 이미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손에 쥐어진 망치가 큰 위안이 되고 있었다. 노랑도사견의 독기는 하늘을 찌를 듯 차고 넘쳤다. 검정도사견의 죽음과, 홀로 견뎌야 하는 적막과, 피 범벅된 복수를 고스란히 으르렁 대는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나도 피할 마음이 없었다. 잠깐 은영이가 생각났지만 부질없다고 애써 도리질을 했다. 약간의 대치상태로 서로를 탐색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이미 공격이 방어라는 것을 경험으로 익혔기에 득달같이 덤벼들었다. 도사견의 큰 몸집과 엉키면서 마구 망치를 휘둘렀다. 몸을 사리거나 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날선 비명을 내지르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마구잡이로 발톱과 이빨로 내 살점을 찍어 눌렀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통렬한 아픔이 거기 있었다. 피가 튀었다. 뼈마디가 어깨어지는 소리가 분명 노랑이 몸에서 들렸는데도 한번 물은 주둥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휘두르던 망치를 놓쳤다.
더 이상 충격을 가할 마땅한 무기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망치질을 견뎌내면서까지 흐트러짐 없는 공격성을 갖춘 노랑이의 몸에 주먹으로 반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순순히 받아들이자. 무엇이 온전한 하늘이고 무엇이 가없는 바다인가. 노랑이의 이빨이 내 목덜미를 물었다. 덥석 문 이빨이 목덜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은 또랑또랑했다.
한차례, 파도가 다녀갔다. 햇살이 고왔다. 꿈결처럼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책장을 덮듯 남루한 한 생애가 저물고 있었다.
멀리, 은영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뿌옇고 희미하고 아득한 영상이 시야에 담겼다. 노랑이도 사력을 다한 거친 숨을 뱉으며 온몸의 무게를 내게 싣고 있었다.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없지만 목을 타고 흐르는 피가 엉키면서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천지가 요동치고 생명줄이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다고 분명하게 다가왔다.
은영이가 나를 깨어나라 흔들었다. 흔들고 흔드는 손길도 점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죽기직전 쾌락과 행복감에 따른 도파민 물질이 최고조에 이른다는 설(說)로 1차대전 병사들이 연쇄 자살로 이어졌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죽음이 거세게 덮쳐오는데 여전히 충만한 기운이 돌지 않고 있다. 다만 편안함에 이르런 느낌이라면 내가 죽은 건가. 아니면 세상이 멈춘 건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