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일의 성패는 내 마음속에 달렸다 해마다 떡국을 먹으면서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식은 커가고 몸은 늙고,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는데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세상 살기는 점점 힘들어져 가니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 앞에 어지럽고 복잡한 마음 다 털어 놓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새로운 힘을 얻어가려고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혹시 바둑 두실 줄 아십니까? 요즘은 바둑  때문에 과부 아닌 과부노릇을 했던 여인들이 남편과 한 수 두고 싶어서 바둑을 많이 배운다고 하더군요. 바둑은 단순한 오락이 아닙니다. 많은 지혜와 인생철학이 담겨져 있어서 예로부터 선인들이 즐겨왔습니다. 바둑을 두다보면 자신의 감추어진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 조용해 보이는 사람도 상대편의 돌을 잡으려고 기를 쓰는 반면, 평소 말이 많던 사람도 막상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그 행마가 물 흐르듯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둑 고수들이 많습니다. 고수들은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욕심을 갖거나 흥분해서는 상대편의 의도를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스타일마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둑은 아주 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마치 도를 닦는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저도 바둑을 좀 하기는 했는데 잘 두지는 못합니다.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해 볼까요? 바둑얘기를 꺼낸 것은 살아가는 이치도 바둑을 두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기에 봉착하더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태를 수습해 간다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일은 계획에서 시작되고,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계획을 세우셨을테니 이제는 그에 따라 노력할 일만 남았습니다. 노력을 불교적 용어로 다시 말한다면 ‘정진(精進)’ 혹은 ‘선정(禪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동적인 표현이고 선정은 정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이르는 일, 다시 말하면 진정한 이치를 생각하면서 생각을 고요히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수행이 노력이자, 선정이라 하겠습니다. ‘천수경’을 외우다보면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티끌 씻어내고 괴로운 바다 어서 건너 바른 법의 방편문을 속히 얻게 하사이다. 신비로운 대비주를 읽고 외어 지니오니 뜻하는 일 마음대로 이뤄지게 하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원하는 바를 부처님과 보살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하였으니 어서 부처님과 보살님께서 우리 중생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진리를 깨달아 뜻하는 일을 다 이룰 수 있게 가피를 주십사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꼭 부처님께 올리는 기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에 대한 약속이자, 내 자신을 채찍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세상의 고통을 어서 벗어나려면 바른 진리에 의지하여 뜻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다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왜 이런 약속을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를 깨닫는다면 고통을 여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산다면 어떻게 해야 세상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께 기도하고 발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을 깨달으면 내 마음대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은 흐뭇한 일입니다. 마음이 모든 일의 주인이 된다는 가르침은 ‘화엄경’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여래(如來)를 만든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악마의 길과 부처의 길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생도 지옥이냐 극락이냐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래를 만드는 것이니 내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내가 부처처럼 극락에서 살 수 있는 것이며, 마음을 잘못 먹으면 늘 마음속에 악마가 들끓어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늘 살면서 하루하루 극락과 지옥을 오고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제 마음이 이처럼 변화가 많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극락과 지옥을 드나드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중생의 마음이라 변화가 무쌍한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사나? 배고픈 사람은 어떻게 사나?”하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부잣집 잔치에서 그동안 못 먹었던 것을 다 먹으려는 듯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배가 너무 불러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자 이제는 배고픈 것이 부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배부른 사람은 어떻게 사나? 부자는 어떻게 사나?” 물론 불자님이 이렇게 미련한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을 먹는 것도 부정적인 것,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곧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생각하고 옳은 행동을 마음먹고 있으면 좋은 일이 오게 되어 있지만 미련한 생각을 하다보면 행동도 미련해지기 마련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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