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자(侍者) (5) 하늘이 보일라 치면 바람이 눕고 풍경소리 잦아지면 아침이 오더라 설익은 열매를 넘어 철새는 멀어지누나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저 골짜기에도 이미 물이 오르고 잎새가 무성한데 어쩌란 말인가 여인의 입안에서 굴리듯 나직하게 들렸지만 타심은 소담스럽게 낚아챘다. 마치 아침이슬처럼, 물안개처럼 곧 소멸한다는 조바심으로 곱씹기 시작했다. 여인의 뒷모습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쓰개치마로 가리개를 하고 있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품격은 호흡이 멈출 것처럼 압도되고 있었다. 옷으로 치장한 속살은 보이지 않았지만 파동 되는 기운이 타심의 촉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차라리 눈도 멀고 귀도 멀고 싶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수행을 향한 다가감을 멈추지 않고, 미혹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열반 속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이 난관만 이겨내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되는 한 여인의 음기가, 나름대로 쌓아올린 불공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정신도 그랬고 육신도 그랬고 제단 앞에 받힌 물질도 여지없이 공염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그 여인은 ‘황진이’였다. 불이 켜진 지족선사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황진이의 자태는 놀랍고 신비했다. 천마산의 사계(四季)중 으뜸이라는 가을산도 이삭을 떨어낸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이토록 범상치 않은 기운이 회오리치고 있을까. 타심은 머리가 지끈하도록 혼란스러웠다. 관절이란 관절은 무장해제 되고 있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었다. 타심은, 이제 자신의 의지는 존재하지 않고 누군가에 조종당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것이 황진이라면 백번도, 천 번도 몸을 맡기고 싶었다.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함께 들어간다 해도 결코 후회 없을, 황진이는 지족선사의 선방(禪房) 앞에 걸음을 멈췄다. “벽면수행에 들어가신 큰스님께 먼저 아뢰겠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계십시오.” 쓰개치마 속 눈동자가 엷은 미소를 띠면서 합장을 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도 하염없이 고왔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단전에 목소리를 모았다. 황진이의 체취가 망설이지 않고 음습(陰襲)해왔다. “큰스님이 말씀하신 손님이 삼경을 넘긴 시각에 당도했습니다.” 반응이 없었다. 혹시 잠이 드신 것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움으로 재차 아뢰었다. “속세에서 보살님이 오셨습니다. 방문을 허락해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선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짧고 굵은 기침소리는 긍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련으로 통해 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섬돌에 꽃신을 벗고 잠시 옷매무새를 단장하던 황진이가 타심의 눈과 마주쳤다. “동자스님의 잠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바깥바람도 있으니 안에서 몸을 녹이세요.” 자신의 존재를 읽어주는 황진이의 마음 씀씀이가 철썩철썩 와 닿았다. 선방의 여닫이문이 닫힐 때 까지 타심은 그 자리에서 장승처럼 서있었다. 그리고 한걸음에 달려가 언덕바지에서 오줌을 갈겼다. 마치 영역표시를 하는 맹수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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