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자(侍者) (6) 황진이는 선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것은 곧 자신의 세상과 판이하게 다른, 삼라만상의 중심부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지고지순의 공간과 유유자적의 시간에 합당한 하나의 깨우침을 향한 허기(虛氣)의 발걸음일 것 같았다. 지족선사의 등과 마주하면서 합장을 했다. 얇은 호롱불 심지가 최소한의 빛을 밝히고 있었다, 지족선사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고여 들었다. 흐트러짐 없이 벽면수행을 고집하는 지족선사의 마른기침이 몇 번 파장(波長)을 일으키고 있었다. 숨죽이면서 황진이는 기다렸다. 시자의 전갈로 자신의 존재를 감지했을 법한데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순간적으로 망각한 것일까. 아니면 수행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무념무상의 좌선일까. 아니면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고단위 술수일까. 고리타분한 늙은 수컷의 냄새가 방안 가득 진동하고 있었다. “선사님, 소녀 황진이라 하옵니다.” 저려오는 발끝을 참지 못하고 황진이가 불쑥 말을 던졌다. 여전히 벽을 마주하고 있는 지족선사의 어깨가 잠시 흔들린다 싶더니 이내 평온을 찾고 있었다. “오는 길에 물속에 잠긴 천마산을 보았습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거꾸로 잠긴 천마산이 하늘과 구름과 낮달을 자신의 살점처럼 옮겨놓고 있었습니다.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셈이지요. 선사님의 기운이 거기까지 미친다고 소녀가 받아들였습니다.” “농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시게.” 탁하면서도 곧은 지족선사의 말소리에 황진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사님과 마주하고픈 소녀의 심정을 헤아려주시겠습니까?” 호롱불 심지를 타고 흐르는 기름방울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껌뻑껌뻑 거렸다. 어쩌면 지족선사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황진이에게 정면으로 얼굴을 내주었다. 호롱불도 반짝 빛을 발했다. “먼 길 온 손님에게 도리가 아닌 줄 알고 있지만 이해해주시게.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묻어있어서 그렇다네.” 합장을 풀고 비로소 지족선사를 쳐다보았다. 깡마른 체구에, 어깨는 굽었고, 검버섯도 피었지만, 사나운 주름살 없이 해맑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에 요동치는 비바람도 없었고 고목을 휩쓸고 간 황폐함도 없었다. 오직 단아하고 표표함이 전부였다. 그래서 속세 사람들이 지족선사의 무너지는 모습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구나. 황진이에게까지 전해질 난공불락이라는 소문이 어느 정도 맹위를 떨치게 하는 순간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있는 자세며 성성한 눈빛이, 황진이가 힘겹게 오른 천마산을 잊게 해 주었다. 그리고 다가가고 싶었다. 천하의 황진이에게 승부욕이 곰실곰실 살아났다. 벽면수행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는 고행의 수도승이기 앞서, 황진이의 눈에 정복하고 싶은 남자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선사님, 황진이라는 소녀의 성명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마터면 지족선사의 입에서 ‘알다말다’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뻔하였다. 저자거리에 이미 파다하게 퍼진 황진이의 일화를 탁불승(托鉢僧)으로 다니면서 귀동냥으로 듣고 있었다. 이웃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자 죄책감으로 기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미모와 가창과 서사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다는 하늘아래 으뜸이라는 황진이를 이번에는 지족선사가 쳐다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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