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몇 년 후 밀레의 작품은 진짜로 화단의 호평을 받아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된 밀레는 친구 루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루소가 몇 년 전에 남의 부탁이라면서 사 간 그 그림이 그의 집에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밀레는 그제서야 친구의 마음을 알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가난에 찌든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사려깊은 루소는 남의 이름을 빌려 밀레의 그림을 사주었던 것입니다.
어려울 때 어려움을 나눠 갖는 것이 사람 사는 정겨움인데 저 자신부터 남에게 인정을 베풀기 보다는 남이 나를 도와주기만을 더 바랐던 것 같습니다. 불자로서 좀 더 보살행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5세기 티벳불교의 지도자였던 쫑카파(Tsngkhapa)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보살이 최상의 지혜(반야)를 궁구한다 하여도 다른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을 쓰지 않는다면 그는 참다운 보살이 아니다.”
즉, 이 말은 “가장 훌륭하게 불교를 실천하는 자는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는 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라나 나라에 12년간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농작물의 수확이 없기 때문에 많은 인민들이 굶주리게 되자 범예왕은 창고에 있는 곡식을 모두 백성들의 수에 비추어 골고루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창고에 비축해둔 곡식으로는 아끼고 아껴서 여섯 해 동안은 백성들에게 공급할 수 있으나 그 다음은 더 큰 문제였습니다. 왕이 이를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한 바라문이 곡식을 받지 못해 굶어죽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양곡을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왕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 이제 조그마한 굶주림과 목마름도 참지 못한다면 어떻게 미래세에 한량없는 세간에서 중생들을 위해 그 추위와 더위와 목마르고 굶주림의 온갖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자신이 먹어야 할 곡식의 절반을 바라문에게 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에 감복한 제석천이 왕의 마음이 허위가 아닌가 시험하기 위해 바라문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병들어 줄게 된 모습으로 지팡이를 잡고 나타났습니다. 이를 보고 왕은 중생을 이익케 하면 죽어도 아무런 유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남은 곡식의 절반을 병든 바라문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병든 바라문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대왕이 이렇게 보시를 하시는 것은 혹시 전륜성왕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까, 세간의 어떤 영화와 향락을 구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 보시하는 것은 전륜서왕의 몸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세간의 영화와 향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오. 오직 소원은 미래세에 정각을 이룩하여 저 추위와 더위와 굶주리고 목마름의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것 뿐이오.”
이같은 왕의 서원을 듣고 바라문은 더욱 감탄하고 곧 제석천의 본래 몸을 회복하면서 말했습니다.
“원컨대, 대왕은 이제부터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빨리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소서. 앞으로 이레만에 내가 틀림없이 단비를 퍼부어 주리라.”
그 뒤 백성들은 한없이 풍부해져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범예왕이 바로 부처님의 전신이었습니다.
넉넉한 자비심은 세상이 각박할수록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베풀것이 없다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어려움을 위로해 주고,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라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보살행입니다.
진정한 보살행으로 어려운 시기에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세상이 되도록 하십시오. 어려운 시기에 지은 복은 반석위에 지은 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편안한 방법
세상이 점점 난폭해지고 있습니다. 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불을 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생기고, 남의 차를 훔쳐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좀도둑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풍요해야 세상인심도 좋아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로가 살기 힘들다고 하는 세상에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까지 생기고 있으니 스님,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폭행과 도둑들의 횡포로 피해를 입는 것 외에도 요즘은 잘 아는 처지에 보증을 섰다가 망하게 된 집안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서로 믿는 마음이 있기에 몇 천만 원의 보증을 서주었는데 그러나 선임으로 인해 온 집이 길에 나앉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면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비닐하우스에서 특용작물을 재배하며 살아가던 어느 마을은 시설을 마련하느라 서로가 연대보증을 서 주었는데 어느 한 사람이 빚을 갚을 수가 없어 도망가자 보증을 서 준 사람들이 줄줄이 피해를 입게 돼 마을전체가 고통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살기 위해 연대보증들을 선 것인데 그런 피해가 생겼으니 서로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런 저런 일로 인하여 요즘은 안 믿고 살수도, 믿고 살수도 없는 세상이라는 말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털어 놓고 대화하며 살 수 없다면,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믿고 살아갈 수 없다면 그야말로 고독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각자가 자신의 재주로 먹고 사는 것 같은데도 가족이나 이웃, 동료나 친지가 없으며 사는 맛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내 말을 들어주기도 하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더 살맛이 나서 열심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자꾸 험해지다보니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한 상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이토록 고통스럽게만 살다가 간다면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람이 먹을 것을 먹고도 불편한 마음으로 인해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경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불자님들은 그러한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고 보다 편한 마음을 가져보려고 이곳에 오셨으니 오늘은 이 세상을 사는 가장 편안한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