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자(侍者) (9) 숯 검댕 같은 어둠이 바스락바스락 부서지고 있었다. 엉켜있는 나무가 숲이 되듯, 돌과 흙이 산이 되듯 서로의 간격에서 내달리던 하나의 달음박질이 시간과 장소에 닿았을 때, 명분 있는 가치와 기준을 뿜어내었다. 여명이 만들어졌고 어제처럼 아침으로 탄생되었다. 미상불 쉽게 세상의 혈맥을 하나같이 잇진 않았다. 저마다의 각진 노력들이 짝을 이루었을 때 생명을 길어오르는 숨결은 뜨거워졌다. 제 색을 저마다 조금씩 반기면서 하늘보다 더 먼 곳에서 부터 수런거림을 기점으로 켜켜이 일어났다. 일상을 배급할 충분한 자격이 있기에 눈뜬 자들은 기지개를 켜고 저마다 할당량을 챙겨갔다. 타심은 황진이의 보폭에 맞춰주고 있었다. 천마산이 있기에 지족암이 존재했다. 지족암이 있기에 지족선사가 자리를 지켰다. 지족선사가 있기에 시자(侍者)가 그의 그늘로 찾아들었다. 때로 이 모든 연결고리가 지당한 업보였다. 합당한 인과응보이기도 했다. 귀밑 머리카락을 흔드는 순한 바람도 행여 보아줄리 있건 없건 타넘지 않고 그 순리와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었다. 키 낮은 풀잎에 맺힌 이슬들이 종아리에 달라붙었다. 종아리의 찬 기운은 결코 걸음을 흔들어 놓진 않았다. 비로소 소생하거나 기운찬 활갯짓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타심은 한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황진이의 발걸음에 귀를 열어놓았다. 어느 약진이, 어느 탄력이 자신을 이토록 흔들어 놓고 있을까. 천마산 아래로 향하는 산길이 문을 닫기를 소원했다. 아니면 시간이 멈춰 나무가 되거나 무심한 돌이 되어도 차라리 행복할 것 같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금의 내 죄를 어이할거나.” 속으로 곱씹은 죄를 스스로를 자책하면서까지 타심은, 황진이와의 동행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죄과로 인해, 죽은 뒤에 견뎌야하는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해도 능히 감당할 형벌로 여겼다. “동자스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시나요?” “어떻게 하면 저잣거리까지 무사히 보살님을 모셔가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짓말에 타심은 스스로 놀랐다. 쓰개치마의 매무새를 고치는 황진이의 표정을 읽고 싶었다. 동이 터는 동녘하늘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타심이 걸음을 멈췄다. 이미 황진이의 벼락같고 천둥 같은 존재감으로 불심이 허물어진 파계(破戒)가 승복주머니에서 만져졌다. 타심은 해를 가리켰다. 이지러진 자신을 간신히 버틸 안간힘처럼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보이십니까? 어제는 어제로 물러갔고, 오늘은 오늘로 받들어야 할 거대한 빛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음을.” 순간 쓰개치마를 걷어낸 말간 얼굴의 황진이가 웃음을 배여 물었다. “훌륭한 스승님의 그늘이 강동 팔 백리에 닿아있군요. 불심이 익을수록 시심(詩心)도 알이 차게 됩니다. 더 정진하시면 선사님을 넘어서는 큰스님으로 우뚝 서실 겁니다. 제가 가까이에서 지켜봐도 되겠습니까?” 타심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까이에서 지켜본다는 말을 편한 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풀숲 더미에서 도적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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