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먼 길이었다. 지척을 두는 길이 아닌 멀리 보는 한세상이었다. 덧없음으로 굽이쳐 돌아보면 짧게 느껴질지언정 가고자하는 그 길은 나무의 나이처럼 둥글게 새겨졌다. 그래서 아침이 있고 한낮이 있고 무수한 저녁 무렵에 당도하게 되었다. 인생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릴 싹 하나 틔우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바람도 이겨내고 눈보라도 견뎌내고 안간힘으로 꽃 한 송이 피울 자신의 흔적을 퍼뜨리고 싶어진다.적문의 행선(行禪)은 예전 같지 않았다. 휘적휘적 수도승의 발품이 딱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두워질수록 밝아지는 패기가 있었다. 스무 살의 나이는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정진해야 마땅한데 왠지 시들해져있었다. 꺼내지 못한 호리병속의 새는 한 여인의 알몸이었고 요 며칠 마음을 소란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명신의 호된 질책을 듣고 명신암을 빠져나온 적문은 쉬 가라앉지 않은 번뇌로 요동치고 있었다. 아무도 적문이 가는 그 길에서 마중 나와 있는 인연은 없었다. 온몸을 비트는 고독이 열꽃처럼 피어나고 있었을 뿐.굼돔마을 초입에는 열녀문이 세워져 있었다. 여인네의 정절과 덕행을 기리는 증표로 버젓하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마냥 빛나지는 않았다. 여인들에게 정절을 강요하는 슬픈 굴레가 깔려있었기에 적문의 한숨이 실려 나왔다. 잠시 긴장을 푼 탓일까. 열녀문 바위 뒤편에 큼지막한 사내가 앉아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기 위해 탁발에 나선 스님, 잠시 쉬었다 가십시오.”걸쭉한 사내 음성에 제압된 몸짓으로 아무렇게나 적문은 걸터앉았다.“처사님께서는 굼돔마을에 어떻게 오셨습니까?”“처사라는 호칭을 받기에는 어쭙잖게도 형편없는 일거리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망나니인데 괜찮겠습니까?”적문은 뒤로 벌러덩 넘어갈 뻔 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천천히 사내를 뜯어보았다. 순전히 관상적인 측면에서 이마며, 눈썹이며, 눈매며, 광대뼈를 각인시키기에 이르렀다. 이토록 비릿한 한 생애를 가진 저 사내의 모멸찬 운명은 뭐란 말인가.“이 근방 관아에선 나를 많이 불러주지요. 고통 없이 단칼에 숨통을 끊어주는 깔끔한 일처리를 죄수 가족들도 뒷돈을 찔러주며 나를 추천해주지요. 힘과 속도와 정확성과 빠른 판단력에 의해 가차 없이 목이 뎅강 떨어지지요. 그때의 성취감은 칼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짐작도 못하겠지요. 껄껄껄.”허공을 가르는 날선 칼 맛도 그렇겠지만 사내의 입담도 여간 몰입되지 않았다.“역병에 의해 시부모가 죽고 아들 하나 있는 열녀가 남정네를 암암리에 찾는다는 말을 믿고 굼돔마을에 들어와 봤지요. 알고 보니 수도승을 기다리고 있다나 뭐라나. 혹시 스님이 그 수도승일지 모르니 후딱 가보세요. 마을입구에 있는 첫 번째 검은 대문이 열녀가 사는 그 집이니 한번 물어나 보세요.”“파계승이 되라고 권하고 계시네요. 처사님께서는.”사내가 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보아하니 창창한 스님의 세월이 아까워서 그럽니다. 속세에서 한 번도 굴러먹지 못한 설익은 몸을 온전히 부처에게 내어준들 진정한 불심이 담길 아쉬움은 내내 남아 있을 겁니다. 나비와 벌이 꽃을 찾는 저 아득하고 뜨거움에 눈을 뜨고 더 열심히 정진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이미 성불한 망나니 말씀으로 새겨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