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4)굼돔마을 입구 정자터에 열녀비가 세워져 있었다. 본시 육모정으로 형체를 갖춘 정자가 있었지만 오랑캐의 화마에 견디지 못하고 건물터와 주춧돌만 나뒹굴고 있었다. 그나마 열녀비로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는 정자터를 상쇄시키고 싶은 열망이 엿보이기도 했다. 적문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월 하늘은 냉랭한 기운을 보듬고 정성스럽게 싹 틔울 봄바람이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첫 번째 검은 대문 앞에 섰다.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다. 바랑 속 발우를 앞세우지 않았지만 복덕을 길러주려는 마음은 간절했다. 얼마 있지 않아 이음새에서 트림하는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남자아이가 쪼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먼동이 트는 듯 왠지 아이얼굴에서 낯선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적문은 수많은 가닥의 인연 줄 중에 필시 한 가닥이 연결되었다고 믿었다. 아이가 안내하는 사랑채로 성큼성큼 따라 들어갔다. 방안의 온기는 적당히 스며들어 있었다. 항시 손님을 접대하려는 주인의 마음이 읽혀졌다. 마당 한 편에 웃자란 풀숲에서 일찍 눈뜬 방아깨비가 뒤뚱거렸다. 미처 닫히지 못한 문틈 사이로 세상이 한 가득이었다. 우물 턱에 걸어둔 두레박 안에서 개똥지빠귀가 후다닥 날아올랐다. 손톱만한 개똥지빠귀의 속을 적신 여유로움이 적문에게 전해져, 한시름 놓을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가만히 벽에 기대어 졸음을 즐겼다. “스님, 상을 차려왔습니다.” 방문을 열었다. 단아한 여인이 소반을 받쳐 들고 서있었다. 여인과 적문의 눈이 마주쳤다. 멈칫, 적문은 시선을 거두었지만 여인은 여전히 붙박힌 시선을 앞세워 방안으로 들어섰다. “혹여 명신암을 아시는지요?” “얼마 전까지 그곳에 묵었습니다.” “그렇다면 새벽예불 시각에 설선당 문풍지를 뚫은 스님이신지요?” 적문은 귓불까지 붉히며 곧 잠길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소만 어떻게?” 여인은 비로소 소반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래도 짐작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호호호.” 겉절이에 달래를 넣어 무친 봄동 향기에 식욕이 동하던 적문이 화들짝 놀란 채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제가 본 설선당 우바이가 정녕 본인입니까?” 여인은 다소곳이 일어나서 절을 했다. “이씨 가문 여식 옥주라고 합니다. 그날의 인연은 필시 만날 인연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지요. 후다닥 설선당을 빠져나가는 스님의 뒷모습에서 머리만 보였지요. 참 반듯하고 단정하다는 생각을 각인하고 기다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답니다.” 옥주는 식사에 방해가 된다며 서둘러 빠져나갔다. 적문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밥그릇을 비우고 무엇에 홀린 듯 히죽히죽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정진해야 될 수도승의 근간이 뿌리 채 뽑힌 그런 날이라도 상관없이 설선당에서 본 옥주의 알몸이 다투어 자리 잡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