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산(4)
아침식사가 있는 민박집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처음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간격을 유지한 오십 보 뒤쯤에서 내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았는지 딱 한번 돌아봤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을 때 이내 하늘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이 행동이 수상할 법한데 무심하게 여자는 가던 길을 꺾지 않았다. 통제구역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계속 오십 보 간격을 유지하기에는 어색하고 민망할 것 같아 몇 보 떨어진 폴리스라인 앞에서 내 걸음도 멈췄다.
어쩌면 추모객이거나 사망한 가족 중 한사람이라고 인식되었는지 별다른 동요 없이 불에 탄 야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력이 다녀간 억새풀 반은 드러눕고 반은 촘촘히 달린 이삭이 뻗어 은빛부챗살로 너풀거렸다. 마냥 경치에 잠겨있을 수밖에 없는 나를 두고 여자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섧게 복받쳐오는 설음이 흥건하게 야산에 뿌려지고 있었다. 묵념하는 자세에서 여자를 지켜보았다. 야산 중턱에 움푹 파진 구덩이가 그날, 처참했던 비행기 추락 사고를 가감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곳곳에 두고 간 꽃다발은 시든 꽃잎으로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오래도록 울었다. 그 울음은 지극히 절제된 속울음이었지만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울다가, 다리에 쥐가 났는지 비틀거리며 일어나 종아리를 매만져 주고 있었다.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여자 쪽의 반응에 자신이 없어서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야산은 아직 탄내가 빠져나가지 않는 채로 후각 속에 맴돌았다. 민박집에 돌아와 한 다리를 다른 무릎에 걸치고 팔베개로 누었다. 천장 안에 무릎 꿇은 여자가 그려졌다. 섧게 울면서 한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다. 분명하진 않았지만 연인을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확신은 지울 수 없었다.
다음날은 읍내까지 걸어갔다. 족히 민박집에서 두 시간 거리였지만 ‘돌아서 가자’는 생각과 ‘조금만 더’ 생각이 밀고 당긴 끝에 만강읍내로 들어서 버렸다. 차를 두고 이만큼 걸어본 적이 실로 까마득했다. 치기어린 스무 살이 되던 해 발품을 앞세워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산천의 곳곳을 다니면서 문득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닌 김정호를 연상했으니 그런 치기가 어디 있겠는가. 문방구만 가도 이 잡듯이 뒤진 지도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면서 말이다.
상거지 꼴로 동가식서가숙 했지만 메모는 철저히 한 거로 기억된다. 몇 번의 이사로 이미 버려졌지만 메모장의 기억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기 위한 날개짓으로 남아있다. 내게도 무모한 도전으로 들끓던 젊은 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일단 가볍게 우유와 빵으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마트로 들어가자 카운터 앞에서 무릎 꿇은 야산의 여자를 볼 수 있었다. 하마터면 반가움에 알은체를 할 뻔했다. 곁눈질로 훔쳐보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가 사려고 카운터에 올려놓은 물품에 자연히 눈길이 갔다. 번개탄과 소주 두병과 새우깡과 라이터였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가 봐도 자살을 암시하는 물품을 봉지에 받아들고 여자가 출입구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우유와 빵을 포기하고 곧 여자를 따라나섰다. 어떻게 한다는 계획도 없이 무작정 뒤를 쫒는 내 행동에 확신이 없었지만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던 여자를 살려놓고 싶었다. 주차장에 정차해 있는 자신의 차 앞으로 다가가는 여자를 가로막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