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2)
뜨거운 꼭지를 틀어놓고 어느 정도 차올랐다 싶으면 차가운 물로 온도를 맞추었다. 수위적정선까지 차오른 욕조 속은 늘 이채롭다.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물속인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똬리를 틀고 있을 신비함마저 종종 느끼곤 했다. 그건 아마도 욕정을 불러 모으는 첫 단추가 욕조로 인식되어진 까닭 때문이다. 어릴 적 고추를 덜렁이며 물장구에 목욕을 하던 강가가 전부인 나는, 동네 형에게 이끌려 극장에 간적이 있었다. 개구멍으로 통해 들어간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불가를 상영하고 있었다.
중간에 들어가서 하필 만난 장면은 욕조 속 정사장면이었다. 남녀가 비좁게 엉켜 뇌쇄적인 눈빛과, 찰진 신음과, 서로를 탐닉하는 끈적끈적한 손길까지 가히 충격이었다.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넋 놓고 본 욕조는 섹스의 상징이었고 손색없는 마땅한 장소였다. 저 거침없이 불사를 수 있는 열정의 욕조에서 목욕이 가당치나 할까. 그 후, 성인이 되었을 때 인어공주가 내 욕조에 살았다. 나를 흔들거나 낚아채거나 휘어잡거나, 발가벗은 내 몸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보이지 않는 인어공주가 척박한 몸을 수시로 공략해왔다. 욕조는 내 속으로 따라와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머리를 물에 담그고 한 방울씩 오르는 물방울을 세어보기도 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미주가 겹쳐졌다. 지금은 신혼여행지에서 다른 남자의 품속에 안겨있겠지. 그 남자도 욕조 속 정사를 즐길까. 내게 조련이 되어있는 미주는 어쩌면 욕조에서 남자를 유혹하고 있을 게다. 내게 조련이 된 미주는 욕조에서 그에 맞는 체위를 알게 모르게 전수시켜줄 게다. 남자는 새롭게 ‘빙고’를 속으로 외칠 게다. 얼마나 치명적이고 뜨겁게 휘몰아치는 광풍인가를, 나를 통해 배운 미주가 남자를 가르칠 게다.
욕조는 그런 곳이다. 사소한 잡념도 떨쳐버릴 당연한 자리매김이 살아있어 몸이 팽창하는 그곳이다. 뒤척일 때 마다 물결은 적극적인 황홀함을 선물했다. 한 번도 기대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거품제를 풀어놓은 욕조는 불끈불끈 어퍼컷을 날리기에 적합하다. 새로운 감촉과 새로운 환경에 인간은 진화하기 마련이다. 고요하고 한없이 맑은 거품들이 몸 구석구석을 에워싼다. 반란이라도 일으킬 모든 털은 곤두서고 둥글게 새겨 넣을 본능을 찾아 아끼던 유성을 떨어뜨린다. 이다지도 떨리는 내 몸이 있다는 것만으로 숙연해진다.
욕조마개를 뽑아 깔딱깔딱 빨려 들어가는 물살을 타고 배수구 망에 걸려드는 털을 집어 든다. 쓰레기통에 넣고 샤워기를 틀어 거품을 제거했다. 다시 미주가 생각났지만 타월을 두르고 거실로 나왔다. 무엇엔가 홀린 듯 베란다 문을 열었을 때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잠시 계절을 잊은 나는 추위를 이겨낼 옷을 입고 베란다로 나가 중고 사이트에서 산 빈티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묻어났다. 방충망 사이로 공원조성 부지에 중단된 공사로 파헤쳐놓은 웅덩이가 더 을씨년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일월이다. 각오를 필두로 대책을 세워야 하는 새해를 맞이했다. 한해가 갈수록 단련되어야 할 몸이 느슨해지는 이유는 그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늘 좌절하고 후퇴하는 나를 보며 체크 남방 안에서 키우던 근육의 행방만 찾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데 까지 버틴다는 오기와 근육을 동일선상에 놓았기에 이만큼 왔다.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깍지를 끼고 이마에 두 손을 모았다. 미주가 내 옆에 있었다면 그에 대한 합당한 해결방안을 함께 찾아갔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