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4)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미주를 만났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한 남자의 품속에서 육박칠일동안 안겨 있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찜찜했다. 그러고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결정적 한방을 제공받지 못한 아쉬움이었을까. 한 남자로 만족하기에는 더 간절한 무엇이 있었을까.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미처 짐을 풀기 전에 전화가 왔다는 것이 그다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약속장소 ‘모란’에 들어가기 전 주차장에서 만났다.
하마터면 덥석 손이라도 잡고 싶은 반가움이 앞섰다. 지난 몇 해를 만나면서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연애는 이 거리에서 발화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만날 수 없고 쉽게 연락할 수 없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만나는 긴장감은 더욱 배가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한낮의 햇살은 고왔고 한낮의 바람은 한결 부드러웠다. 맞은편에서 잠시 멈춰 생뚱하게 바라보는 미주도 같은 생각으로 자극되었을 것이다.
‘모란’ 안에서 봐야 될 약속이, 장소가 조금 앞당겨짐으로서 미묘한 감정의 새싹들로 더욱 무성하게 되었다. 굳이 ‘모란’안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잠시 걷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미주도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처럼 활짝 웃었다. 카페 모란은 강변에 지어져 있었다. 일월, 날씨치고는 순하고 나직했다. 강변 산책로에 저마다 겨울을 버티는 나뭇가지가 앙상했지만 연말장식으로 매단 똘망똘망한 전구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십이월로 접어들자 크리스마스라더니 어느새 일월이고 구정분위기에 들떠있는 모양새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건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렸다. 허긴 사십대에 접어든 나는 반평생을 살았다는 자책감도 없지 않았다. 이뤄놓은 것도 없이 당연히 물려줄 것도 없이.
“오빠, 내 전화를 받고 약간은 놀랐죠?”
“놀랐다기보다 주인을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내안에 남아 있었는데 그 실체를 깨닫게 된 거지. 그때는 몰랐는데 한 때 ‘윤미주’라는 섬이 내게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푸훗. 말해놓고 보니 닭살이긴 하네.”
“울 오빠 철들었네, 호호.”
“그때 내가 놓아주지 않았으면 미주가 내 곁에 남았을까하는 의문은 여전하고 설사 남았다고 해도 우린 더 절실한 무언가를 찾아, 헤어질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어.”
“빙고! 사실 오빠를 두고 저울질 해보곤 했지만 우린 부부의 인연으로는 2프로 부족, 연인의 인연으로 만점, 나이가 차고 주위의 성화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오빠는 후보의 대열에 없었어. 그렇지만 은박지속에 알사탕처럼 아끼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했어. 만사 제쳐두고 오빠를 만나러 왔다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지?”
아홉 개 꼬리달린 구미호에게 한 개뿐인 내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만나면 투정과 응석도 부리면서 볼멘소리로 응수하려고 했는데 미주를 본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지지부진한 아파트 주변 공사장에 청둥오리 한 쌍을 보여주고 싶었다. 겨울 먹이로 가져다주는 잡곡 쌀을 함께 놓아주고 베란다에서 눈만 빠끔 내어 훔쳐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미주와 안성맞춤인 욕조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기 싫었다.
-계속
​